참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풀어 놓을까 한다. 조금은 생소한 주제라 이야기를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적 부터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양쪽 청력은 좌우 95dB로, 자동차의 경적소리조차도 보청기 없이 혼자서는 듣기 힘든 청력이다. 그럼 수화를 쓸까? 그렇진 않고, 상대방의 입모양과 눈빛을 읽어서 대화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그럼 학교 수업은 어떻게 듣나요?” “헉, 그럼 미국에 가서 영어로 하는 수업은 어떻게?” 오늘은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 ‘실시간 속기 서비스’. 전공 토론discussion 시간에 조교인 사샤가 열강하고 있고 강의내용이 빼곡히 적혀 올라간다. | ||
▲ 인류학과 전공 마리코 타마노이 교수님의 수업시간이다.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오른쪽에서 멜로디가 빼곡히 적어 주면 나는 그걸 읽고 나만의 노트(왼쪽)를 만들 수 있었다 | ||
교수: 그래서 Nature 와 Nurture는...(잘 안들림) (소리 겹침)
한 남학생: 저기요 교수님-! 잠깐 잘 안들려요.
교수: 아, 밖에서 저거... 뭔 소리지?
(창 밖에서 기계음. 트트트트트트트트트트트)
한 여학생: 어떤 사람이 잔디를 깎는데요.
조교: 저런, 잠깐만요.
(외침- 저기요오오 아저씨!!! 저희 수업중인데에에-!!)
(다같이 깔깔)
▲ 이게 바로 그 속기 기계이다. 컴퓨터용 키보드와는 달리 한번에 8-10개의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데 그 때마다 한 문장씩 팍 팍 입력된다. 속기사들은 이 큰 속기기계, 이 속기기계를 받치는 쇠로 된 삼각대, 노트북, 각종 어댑터 선 등 묵직한 장비들을 기내용 캐리어에 넣고 다니며 매 수업 10분 전에 와서 조립하고 매 수업 키워드를 미리 입력해두며 수업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한국에서는 내가 무거운 노트북을 매일 들고 다녀야 하는데... | ||
간혹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말해서 소리가 겹친 경우에는 (소리 겹침),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한 경우에는 (잘 안들림), 이처럼 가능한 한 모두 입력을 해 주고 간혹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지시어를 많이 사용하셔서 속기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경우에는 (파워포인트 자료를 화면에 띄워놓고 “이 것은 이 것의 종속개념이고 저 것은 이 것과 유사한 개념이며…”라고 설명하는 경우 속기화면만 읽고선 이해하기 힘들다.) 수업이 끝난 후에 보충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 1년을 동고동락했던 속기사 멜로디Melodie, 아나스타샤Anastasia와 함께.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속기사들이다. | ||
이처럼 질 높은 속기록을 만들기 위해서 속기사는 100%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초초초집중하기 때문에 노동의 강도가 상당히 높다. 그야말로 토씨도 빠뜨리지 않고 입력해야 하기 때문에 두 속기사가 15분에 한번씩 교대한다. 서당 개 3년이면 공자왈 맹자왈 한다는데 이 분들은 UCLA에서만 10년을 넘게 일한 분들이라 강의를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이건 즉 10년 전에도 이미 속기제도가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괜히 선진국 명문대가 아니다.) 학교에서 보조되는 예산으로 수업교재를 사서 따로 키워드를 익히는 등 끊임없이 공부하시는 분들이다. 그러니 속기록이 완벽할 수밖에. 내 표정만 봐도 이해했는지 아닌지 바로 알아채는 이들은 진정한 프로다. 두 명이기 때문에 간혹 기계나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키는 ‘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어 단 한번도 펑크를 낸 적이 없었다.
▲ 한국으로 오기 전 내가 준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멜로디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 아나스타샤. 1년간 내 수업을 책임지고 속기를 해주셨는데 매일매일 한번도 늦거나 펑크내는 일 없이 완벽하게 잘해주셨다. 매일 만나면서 정이 많이 들었는데 너무나 보고 싶다. | ||
이처럼 선진적인 장애학생 지원 서비스는 UCLA의 장애학생지원센터인 OSD(Office for Students with Disabilities)에서 기획하고 지원한다. OSD는 학교 내 완전한 하나의 행정부서로 20여 명이 넘는 정직원 및 스탭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각장애 뿐만 아니라 지체, 시각 등 다양한 장애종류별로 전문 직원들이 나뉘어 일하고 있다. 이동이 불편한 학생들을 위한 교내 셔틀 밴서비스도 운영하며 중앙도서관에도 시각장애학생들을 위한 스캔 및 점자화 작업을 하는 직원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교내 모든 건물에는 엘리베이터와 자동문이 설치되어 있으니 제도와 시설, 사람들의 인식 그 모든 면에서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심지어 초,중,고등학교에서도 속기를 지원받을 수 있다.
▲ OSD(Office for Students with Disabilities) 와 수많은 상근직원들. 운영시스템이 참으로 체계적으로 잘 짜여 있다. 수염 텁수룩한 Dan Lavitt 씨는 청각장애학생을 전문으로 지원해주시는 분인데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Ed씨는 노트필기 도우미 학생을 지원하고 밴 서비스를 운영한다. | ||
'하나의 목적에 의한..... 것을 표현한 것... 짐멜이 하나 해결책으로 친교.... 분화되면서 .., 화폐가.... 친교... 다양한 목적 관계 가지고 만들어진다..'
이렇게 드문드문 작성된 대필 내용을 보면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시험을 봐야 할지 막막하지만 그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하고 감지덕지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특히 청각장애는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학생수도 적기 때문에(현재 우리학교에서 대필지원을 받는 학생은 나 혼자뿐이니…)더욱 교육권이 소외되고 있다.
매일 무거운 노트북과 책이 든 바위덩이같은 배낭을 매고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종합관 앞 언덕을 오를 때면 UCLA에서 받던 꿈만 같았던 시스템이 그리워진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우리학교에서도 선진적인 마인드와 함께, 누구든지 차별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조성해야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한국 내에서는 최고의 명문사학으로, 세계적으로도 100대 대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기름진 토양에서 자란 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맺는 것처럼.
▲ 우리는 다만 서로 색깔이 다른 배를 탄 것 뿐이다. 이 세상 누구나 똑같은 사람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
출처:연세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