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의 따사로움이 조금 진해지고 신고 있는 신발의 발등도 따뜻해진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화려하게 뭉개진 유채화 같던 꽃잎들이 시들기도 전에 바람에 날려 거리를 어지럽히고,
들에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잔뜩 매달려 푸른빛이 진해지면 여름 냄새가 조금씩 나는 것 같다.
좋았으니까, 좋아서 더 짧게 느껴지는 봄날이 어느새 끝나가고 있다는 아쉬움에
이제는 조금씩 옅어지는 봄날의 향기를 한 번 더 깊게 마셔보고 싶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서로가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약간의 긴장을 하게 마련이다.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도 아니었고,
이미 이별을 경험했던 연인들이라서 그런 느낌에 더 민감했다.
어쩐지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내 감정을 의심하고,
상대의 마음을 더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쓸데없이 전에 사귀었던 그녀와의 이별했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언제나 새로운 만남과 이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저절로 떠오른다.
어쩌다가 연락이 잘 안되더라도 그녀가 바빠서 그러리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두어 번 통화가 어려워지면 오만가지 잡생각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놨다 안절부절 하게 된다.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도 괜찮을 텐데 꼭 통화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에게 자꾸 통화를 시도하는 것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망설인다.
예전에 만나던 그녀는 나와 함께 걷는 것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매번 만나면 술이나 조금 마시다 그녀의 입술을 탐했었고,
주말에는 내방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었다.
물론 연애초기에는 함께 영화도 자주 보고, 가끔 놀이공원에 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지쳐가던 서로가 서로에게 점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걷기 좋은 봄이 오면 함께 자주 걷자고 했었지만,
난 항상 일 때문에 바쁜 편이었고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그녀가 바쁘기도 했었다.
조금만 노력을 했더라면 여유를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내 곁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를 위해 고민하는 시간보다
삶의 고단함이 주는 고민 때문에 항상 피곤했다.
그래서 그녀는 내게 편히 쉬길 바란다며 떠났던 것 같다.
항상 휴식 같은 친구를 원했던 나와 그녀는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었다.
내가 그녀에게 휴식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그녀를 대하는 방식도 바꾸고,
가끔은 특별한 이벤트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은 나를 더 기쁘게 했다.
자주 만나지 못할 때면 통화라도 자주하려고 했었다.
언제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노력했었고,
괜찮은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믿음직한 남자로 보이려고 했었다.
내 삶의 방향을 시시콜콜 설명하며 나와 그녀가 함께할 수 있는 좋은 미래를 그리고 싶었었다.
몇 번의 전화시도에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더 이상 전화를 시도하면 스토커 같은 느낌을 줄 것 같아서 그만뒀었다.
며칠 뒤에 그녀에게 전화가 왔었고, 이제 그만 만나자고 했다.
헤어지기 좋은 계절이었다.
날씨는 따스해서 야외에서 술을 마시기도 좋았고, 좀 과음을 해도 길에서 얼어 죽을 일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마구 길을 걷기에도 괜찮은 날씨였다.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매달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잘 알아서 다행이었다.
봄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겠지만,
헤어지기에도 더없이 좋은 계절이라는 걸 배워야 했다.
그래도 아무리 익숙해져도 아픈 것은 여전히 아프다.
살면서 몇 번이나 문지방을 걷어차고 발가락에 전해지는 그 고통을 수없이 겪어봤지만, 또 걷어차면 또 아프다.
햇볕 따스하고, 화사한 봄날에도 누군가는 이별을 하고 있다. 비라도 왔으면 좋았을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