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이성 때문에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러면서 나의 지난 날들을 되돌아 볼 때, 가장 잘한것과 가장 후회되는 것들로 압축이 된다.
가장 잘한 것은 만나던 이성과 헤어진 것이고,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녀와 사귀면서 허송세월 한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원 나와서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앞으로 내가 있을 곳도 신학교 또는 교회이겠지만 정말 부교역자(담임목사의 따까리)의 삶은 최저시급만도 못한 삶이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여러 동기들이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건강잃고 가정 잃는 모습을 보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어공부 해서 간신히 캐나다에 있는 대학원에 가게 되었고, 되지도 않는 영어 공부해서 간신히 MA 코스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토론토에서 신학석사 1년과정을 하던 중 우울증이 오게 되었다.
토론토는 마치 서울 같았다. 복잡하고, 사람들도 불친절 하고...
각설하고 1학기 하고 중도 휴학하고 한국에 오게 되었다.
사실 결혼 하고 캐나다에 오지 못한 걸 후회했지만 그게 내 뜻대로 되는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크리스챤데이트라는 어플을 깔았다.
그리고 한국 고향에 가서 그동안 연락하던 여자를 만났다.
초등선생이었다.
나이는 40을 바라보고 있는 미혼의 여성이었다.
첫 만남부터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마치 인터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랜 외로움은 무언가를 의지하게 했고, 그것이 그녀였다.
사실, 한국에 온 이유중 가장 큰 목적은 결혼해서 다시 학업을 하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세번째 보던 날 결혼을 전제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을 계속 되었다.
사실, 그녀는 전라도 광주의 초등학교 선생이었는데, 서울을 경험하고 싶다고 서울로 1년간 파견근무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의 고행은 시작된다. 나는 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전도사를 했고, 초등학교에서 영어 방과후와 개인과외로 삶을 연명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버스타고 왔다갔다 하는게 여간 쉬운게 아니었다.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나는 상당히 소진되어 갔다.
그러면서 그나마 벌어들이는 코뭍은 돈들은 그녀를 만나면서 먼지가 되어갔다.
그녀는 초등교사 15년 차로 어느정도 수입이 예상되지만, 그녀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서울 서초구에 오피스텔을 얻었고(이것도 내가 발품팔아서 얻어줌), 그 집의 집기들은 거의 내가 사줬다(TV, 전자렌지, 믹서, 전기밥솥, 등등등). 그리고 5월 정도에 다낭으로 해외여행도 보내줬다. 7월에 크로아티아 간다고 100만원도 줬다.
그렇다. 사실 사랑했기 때문에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있기에 부담없이 나의 선의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결혼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자기를 압박한다고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리고 자신이 40일 기도를 해보고 결정한다고 했다.그게 5월이었다. 내가 1월부터 그녀를 만났고 2월에 사귀게 되었으니, 한 삼개월 사귄 시점이었다.
미친소리 같지만 난 안될걸 알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님을 설득시켰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실 나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렇게 많이 지쳐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고 유야무야로 시간만 흘르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 10월 추석에 부모님이 보자고 했다.
사실 그전부터 그녀에게 부모님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냥 묵살시켰다.
그리고 나는 10월이 데드라인으로 내심 선포했다. 이거 아니면 헤어져야겠다.
역시 그녀는 부모님 볼 것을 거절했다. 그렇다면 나는 전화라도 하는게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유학간게 부모 잘만나서라고 생각하며, 나를 은근히 무시하려고 했고, 너의 능력이 아닌 부모덕에 유학갔다는 말을 서슴치 않았다. 그녀는 이혼 가정에서 10대를 거쳤고, 그런 환경이 그녀의 성격을 형성하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더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폭정은 끝이 없었다.
이렇게 결혼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계속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서로 만난건 서로의 외로움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의 온전치 못한 성장과정의 상처는 나를 통해 상쇄되었고, 나의 외로움 또한 그녀를 통해 치유될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와의 1년 간의 만남은 일장춘몽이었다.
통장에도 먼지만 남았고, 내 시간또한 신기루 처럼 사라졌다.
지금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직업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가난한 유학생이고, 그녀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 난 호구짓을 했고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독서실을 끊어서 다시 영어책들을 폈다.
신학서적들과 해커스토플 교재를 보며 그녀와 허비했던 시간들, 낮아진 자존감, 나에게 투자되지 못한 시간들을 온전히 보상받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올해 다시 9월 학기 토론토에 가서 학업을 마치고, phd 어플라이를 위해 토플 점수를 미리 만들고 있는 중이다.
결혼은 모르겠다.
몇일전 일본 여행 다녀 왓는데, 그녀와 같이 했던 스트레스 받던 여행보단 훨씬 행복하고 자유로웠다.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꿈을 위해 나에게 더 집중하는 시간이 나를 나답게 하는 것 같다.
유학가기 전부터, 교수님과 목사님 여러 사람들과 상담을 하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가 비록 박사학위를 받는다 하더라도 보장되는 것은 없다이다.
맞는것 같다. 사실 어느 누가 예정된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가?
성공의 삶도, 예정된 미래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전 자체가 의미 있는 것 같다.
지난 2년 캐나다에서 석사하면서 진짜 죽을것 같았다. 맨날 페이퍼에 과제에... 졸업하는 전날까지 페이퍼를 썻다.
그리고 다시 캐나다를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점에서, 공부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서 죽으나 저렇게 해서 죽으나 인간은 다 죽는데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 원없이 하고 죽고 싶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쌓아야 할 벽돌을을 너무 방치해 놨다.
나는 다시 그 벽돌들을 한장한장 쌓고있다.
p.s: 얻은 교훈 1. 직업이 그 사람을 온전히 말해주지 않는다.
2. 확실치 않은 이성에게 올인하지 하면 피본다.
3. 가정환경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