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전의 독일과 지금의 일본... 흔히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의 원인으로 베르사이유 조약이 독일인들에게 너무 과도한 책임을 요구한 것을 들곤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2차세계대전 이후 독일인에게 부과되었던 책임이라는 것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독일 영토가 승리자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끝내는 수십 년 간 분단된 채 이어지게 되었으니까. 폴란드와 체코, 프랑스 등에 할양한 영토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독일은 2차세계대전의 패전을 설욕하려 하기보다는 전쟁의 책임을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멈추지 않고 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더구나 실제 베르사이유 체제가 요구한 전쟁배상금 가운데 상당부분은 미국과 영국에 의해 이미 탕감된 상태였다. 독일이 베르사이유 체제의 요구에 따라 지불한 배상금의 금액은 처음 요구한 액수의 몇 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물론 그조차도 당시 대공황의 여파로 휘청거리던 독일경제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액수임에 분명하지만 분명 당시 세계는 독일에 관용을 베풀었고, 오히려 독일은 그 관용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입은 터였다. 그런데도 베르사이유 체제가 너무 가혹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 몇 년 전 나는 책장을 뒤적이다 흥미로운 해석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저술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그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차세계대전의 거의 모든 전투는 독일영토 밖에서 이루어졌었다. 따라서 독일인은 전쟁의 참혹함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다시 국제사회가 그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물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차례로 탕감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당시 독일인들이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 국제사회에 대한 고마움?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죄책감? 그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다시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전쟁은 항상 동경과 향수의 대상이 된다. 강대한 힘과 힘이 부딪히는 압도적인 박력에는 피와 살이 찢기고 흩어지던 전장 바로 그곳에 있던 사람들로부터도 그 살육과 파괴를 잊도록 만드는 강한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전쟁에서 자신들이 제법 선전을 했다면? 지기는 했지만 초반에는 기세좋게 몰아붙여 상대를 압도하고 있었다면? 신문지상에서 정부의 선전에 의해 항상 보았었던 리히트호펜이나 힌덴부르크와 같은 전쟁영웅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주도한 국제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탕감해주었던 것은 아주 제대로 기름을 부은 것이나 다름없다 할 수 있었다. 전쟁배상금의 액수는 전쟁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액수를 국제사회가 알아서 줄여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중 정부가 발표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탕감을 국제사회의 관용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쟁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희석시키는 데에 이용하기 쉽다. 이를테면 전쟁배상금의 탕감은 그들의 작은 승리였다. 전쟁의 책임에 대한 배상금을 줄임으로써 베르사이유 체제가 그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전쟁의 책임에 대한 전승국들의 일방적이고도 부당한 처사였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기묘한 논리적 - 그보다는 감정적 연결을 통해 어느새 독일인들은 스스로의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넘어 자신들에게 과도한 책임을 물었던 전승국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마저 품을 수 있게 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나치즘에 이은 2차세계대전이었다. 반면 독일 영토 내에서 전쟁 초기 독일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끔찍한 살육과 약탈과 파괴가 자행되었던 2차세계대전 뒤로는 독일인 스스로가 전쟁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도 끔찍한 현실에 그들은 자신들이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 결과 전쟁을 일으켰던 당사자들에 대한 증오와 그들을 지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환멸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더구나 국제사회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못한 채 순순히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사죄하고 반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1차세계대전 이후와 2차세계대전 이후의 패전을 받아들이는 독일인의 태도가 다른 것은 전쟁을 얼마나 현실로서 체감했느냐와, 그들의 책임을 희석시켜줄 다른 핑계거리가 있었느냐에 따라 갈렸다고 할 수 있다. 아마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나 소련, 기타 유럽의 나라들이 독일을 쉽게 용서했다면, 그래서 그들에게 가해진 과도한 의무와 책임을 혹여라도 온정으로 줄여주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1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설욕을 준비할 수 있었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독일인들에게 전쟁이 가혹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1차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떠오르는 나라가 하나 있다. 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치른 바 없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제대로 된 책임이 물려지지 않았던 나라. 그래서 어느새 다시금 실력을 갖추게 되면서 과거의 전쟁의 책임을 스스로 정당화하고, 패전으로 인해 부과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 지금의 어떤 나라다. 눈치챘셨으리라.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2차세계대전 내내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영토 어느 곳에서도 전쟁을 치른 바 없다. 물론 폭격이야 당했지만 그것은 전장의 살육과 야만에 길들여진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직접 그들을 공격해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 야만에 의해 죽은, 혹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과 어느날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에 의해 시체가 되어 버리는 것과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핵폭탄조차도 너무나 강력해서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있어 전쟁의 참혹함이라 하면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럽던 패전 직후를 이야기한다. 전쟁 도중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다.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오고 나서, 패전국의 국민으로서 당해야 했던 수모와 모든 것이 파괴됨으로 인해서 겪어야 했던 가난이야 말로 그들이 생각하는 전쟁의 참혹함이다. 당연히 전쟁기간동안 있었던 온갖 살육과 파괴와 약탈의 범죄행위는 그러한 패전 직후의 처참한 현실에 가려져 잊혀지게 되고. 거기다 전후 일본에 대한 승전국의 전후처리는 무척 관대한 편이었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핵심전범 몇몇만이 겨우 도쿄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태평양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천황은 고작 "인간선언"을 하는 것으로 그 책임에 면죄부를 받았다. 막대한 전쟁배상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건재해 있었다. 그나마 전쟁을 일으킨 책임에 대한 제제라고 할 수 있는 무장금지조차 자위대라는 편법을 통해 무력화되다시피했으니 사실상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책임을 진 것이라고는 조선과 대만 등의 식민지를 잃은 것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의 항복선언을 앞당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전후 반핵의 여론을 등에 업고 일본을 피해자로 포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며, 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야 했다는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어간 그 몇 배, 몇 십 배의 사람들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죽거나 다쳤다는 사실은, 원자폭탄이라고 하는 공포에 가리워져 어느새 잊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일본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책임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들을 정당화하려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킴으로 인해서 잃어야 했던 것들을 다시금 되찾으려 발버둥치는 추한 모습들. 그것은 마치 1차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반성하기보다는 그 책임을 억울해 하며 설욕을 꿈꾸었던 파시즘 전야의 독일과 닮아 있다. 제국주의 일본의 강성함을 상징하는 듯 했던 당시 세계최대의 전함 야마토라든가, 영전불패의 신화를 일구어내며 태평양전쟁 초기 태평양의 하늘을 지배했던 제로센이라던가 하는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의 영광을 되새김질하는 것도 그러한 경향의 하나일 것이다. 수많은 전쟁영웅들을 뒤늦게 발굴해 기리며, 전쟁범죄자로 몰려 처벌받았던 이들조차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들이라 찬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적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현실로 느껴본 적 없다. 그나마 그들이 체험한 참혹함이라는 것조차 원자폭탄이라고 하는 인류공동의 "악"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을 피해자로 만든다. 그렇다고 제대로 책임을 물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미국은 오히려 점령군으로서보다 일본의 보호자로 행세하려 했었고, 미국의 도움으로 일본은 전쟁 전보다 더욱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승자이며 점령군이던 미국조차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 다음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니까. 일본에게 있어 침략전쟁의 당사자로서의 자신들의 책임을 규정한 전후의 역사교육은 베르사이유 체제 아래에서 강요되었던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이른바 평화헌법이라는 것 역시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독일의 재무장에 대한 엄격한 제약과 같다. 북방 4개 섬이나 댜오위다오나 독도와 같은 그들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땅들은 독일이 전쟁명분으로 삼았던 그들이 전쟁에서 짐으로 인해 잃어야 했던 영토들을 연상하게 한다. 날로 확산되는 공산주의를 막겠다며 히틀러를 지지했던 미국의 우파 정치인들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하는 현재 부시정권 역시도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 그러면 그 다음은? 이 다음은 과연 어디로 이어질까? 그래서 나는 최근 일본의 우경화가 너무나도 두렵다. 그들이 잃어버렸다 여기던 과거사 문제를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나, 번번히 극우적인 언사로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많은 일본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를 보면 히틀러와 나치당을 떠올리게 된다. 히틀러를 지지했던 수많은 선량한 독일인과 그로 인해 수천 만의 목숨이 사라지는 끔찍한 전쟁에 휘말려야 했던 그 끔찍한 2차세계대전의 역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루어지지 않은, 앞으로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유럽은 나치 독일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낙관적인 판단으로 말미암아 적당히 견제를 해주었어야 할 때를 놓쳐 결국은 2차세계대전이라고 하는 유례없이 끔찍한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이제 얼마 안 있어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일본은 핵폭탄과 같다.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기폭제만 제대로 달아주면 어느 한 순간 아시아 전체 - 아니 세계전체를 참혹한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흉기와 같다. 일본에는 그럴만한 힘도, 그럴만한 의지도 있다. 지금까지 일본이 걸어온 길이나, 지금 일본이 보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단순히 가능성만으로 끝나지 않을 당면한 현실일 수 있다. 과연 그러한 현실에서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그것은 반일을 넘어 우리가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