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 용의자 안모씨는 경찰에서 "3억원의 빚이 있어 고민해오다 술을 마신 뒤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안씨는 불을 낸 뒤 화재현장 근처 망루에서 불을 지켜보다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Hwaseong Fortress
Republic of Korea |
Kyonggi-do Province |
Brief Description
When the Choson emperor Chongjo moved his father's tomb to Suwon at the end of the 18th century, he surrounded it with strong defensive works, laid out according to the precepts of an influential military architect of the period, who brought together the latest developments in the field from both East and West. The massive walls, extending for nearly 6 km, still survive; they are pierced by four gates and equipped with bastions, artillery towers and other features.
Justification for Inscription
The Committee decided to inscribe this property on the basis of criteria (ii) and (iii), considering that the Hwasong Fortress is an outstanding example of early modern military architecture, incorporating the most highly developed features of that science from both east and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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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 꼭대기는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화성의 건설가는 이 곳을 주목하여 군사를 총 지휘할 수 있는 장대를 세운다. 이름하여 화성장대 높지는 않지만 우뚝 솟은 산세는, 산을 두르고 있는 백리 이내의 동정을 앉아서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터가 좁아서 기를 두르고 북을 칠 수 있는 마당이 없었다. 그래서 돌을 쌓고 흙을 보태며 모래주머니를 말뚝으로 고정시켜서 터를 넓혔다. 바로 아래에 있는 행궁을 보살펴야 하고 성 전체의 동정을 낱낱이 알아야 하며, 봉돈에서 받아들인 국경의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곳이 서장대이다. 또한 서장대에서 내보내는 신호는 온 성의 군사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이런 지리적인 이점을 감안하여 장대를 짓고 노대(서노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후당 세 칸을 지었다. 장대의 군사 활동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노대는 중국의 '무비지'에서 그 제도를 본떴지만 약간 달리 만들었다. 무비지에 따르면 노대는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고 노수가 그 안에 들어가 쇠뇌를 쏘는 곳이라고 했다.그러나 서노대에는 집을 올려 짓지 않았다. 화성의 형편에 맞추었던 것 같다.
화성장대는 크지 않게 지었으나 이 층으로 지어서 위엄을 한껏 뽐내려 하였다. 여덟 모 난 긴 돌로 주춧돌을 삼아서 그 위엄에 걸맞도록 했다. 서장대를 짓기 위해1794년 8월 11일부터 한달 간 터를 다졌고, 9월 16일에 상량하였다.
화성 성역의 총 책임자인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이 상량문을 짓고 썼다. 채제공은 1790년에 용주사 상량문을 짓고 쓴 일도 있는데, 화성의 시설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서장대의 상량문만 지었고 또 썼다. 상량한 지 보름도 안된 9월 29일 완공하였으니, 공사 개시로부터 두 달이 채 안 걸린 공사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임금이 [화성장대]라고 직접 쓴 편액을 달았다. 총리대신의 상량문과 임금의 친필을 걸었다는 것은 이 장대의 성격을 드러내는 한 예가 된다.
총리대신 채제공은 상량문에서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누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겠는가?', '오직 화성의 생김새는 진실로 우리나라의 관문이자 요새이다. 이 중책을 맡을 사람은 장수이다.'라고 해서 장수의 역할과 화성의 중요성을 담았다. 그리고 '편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것이 귀중한 것이다.'라고 적어서, 화성의 건설과 화성장대의 의미에 대해 지녔던 총책임자의 견해를 엿볼 수 있다.
1794년 윤2월 12일(양력 4월 초 무렵),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하루 앞두고, 정조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묘원인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그리고 서장대에 올라 장용외영(화성의 군대)의 군사 훈련을 지켜보았다.
이날의 훈련은 주간과 야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특히 야간의 훈련은 대단히 화려하고 놀랄만한 것이었다. 임금도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채 참석하여 짜여진 일정에 의해서 진행되는 대규모 군사 훈련을 지켜보았다.
깃대에 매단 등을 켜서 흔들자 각 문마다 불을 켰고, 나팔을 불고 징을 치니 온 성에 군사가 일시에 늘어서며 행진하였다. 서장대에서 대포를 쏘고 날라리(태평소)를 불면서 청룡기와 청룡등을 세우니 동문(창룡문)에서 대포로 대답하며 고함 질렀다. 주작기에 주작등을 세우면 남문(팔달문)에서 대포 쏘며 고함치고, 백호기와 백호등이면 서문(화서문), 현무기와 현무등이면 북문인 장안문에서 응포하며 고함 질렀다. 그러다가 신기전(신호용 불화살)을 놓으니 온 성안에 삼두화(세 곶이로 된 횃불)가 밝혀졌다. 요즘의 불꽃놀이보다 훨씬 더 화려했을 것이다. 게다가 성안의 민가에서는 집집마다 등을 하나씩 내걸어서 협조하였다.
이날의 전야제는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고 하는데, 구경하는 사람들로 길이 메었고 보는 이마다 생전 처음하는 구경이라 했으니 장관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혹 대포 소리에 놀랄까 걱정되어 대포의 방향을 서북쪽으로 향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전야제의 성격이 짙은 군사 훈련에서도 어버이에 대한 공경을 생각했던 것이다. 또 군사 훈련이 끝난 다음 병졸들에게 상을 내린 것은 물론이었다.
서장대의 대규모 군사 훈련장에서 정조는 총리대신 채제공의 화성 성역에 대한 노고를 치하했다. 채제공이 성의 모습은 갖추어져 가는데 민가가 즐비하지 않고 경제가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아 걱정이라고 하자, 왕은 이용후생의 길을 차근차근 갖추어 나가면 백성들이 몰려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주민들을 위한 정치와 경제 정책으로 화성을 발전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즉, 실학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기 위한 의논이 서장대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이 의논은 만석거 저수지의 건설과 새로 개간한 국영 농장 대유둔으로 이어져 수원이 농업 도시로 자리잡게 하는데 근본이 되었다.
정조는 자족적인 신도시로 화성을 가꾸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화성의 목표를 "호호부실(戶戶富實)이요, 인인화락(人人和樂)이라" 고 삼았던 것 같다. 집집마다 부유롭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한다는 뜻이리라. 이는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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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서장대, 취객 방화로 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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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지난달 26일에는 창경궁 문정전에서도 불이 나는 등 문화재를 대상으로한 방화가 잇따라 당국의 세심한 안전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화성 서장대에 불이 난 것은 이날 새벽 1시 30분께.
술에 취한 안모(24)씨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서장대에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자신의 옷으로 2층 누각 바닥에 불을 붙였다.
불은 기둥을 타고 순식간에 지붕까지 번져 20여분만에 2층 목조누각 전체가 불에 탔다.
불이 나자 소방차 10여대와 소방관 40여명이 긴급 출동해 진화작업을 벌였지만 누각이 소실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방화 용의자 안모씨는 경찰에서 "3억원의 빚이 있어 고민해오다 술을 마신 뒤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안씨는 불을 낸 뒤 화재현장 근처 망루에서 불을 지켜보다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불탄 서장대는 조선시대 장수가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본부로 현재 평일 하루 2만여명의 관람객이 찾을 만큼 화성의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런 명성에 비해 방화 등에 대비한 안전관리는 소홀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에는 소화전이 설치되 있지 않았고 야간순찰도 이뤄지지 않는 등 화재에 무방비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적 3호로 지정돼 있기도 한 서장대는지난 96년 여름에도 방화로 큰 불이 나 재복원됐었다.
앞서 지난달 26일에는 창경궁 문정전에서도 방화로 불이나 400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최근 들어 문화재를 대상으로한 방화가 잇따르면서문화재에 대한 세심한 안전관리가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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