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지난 달에 어머니께 어버이날 선물을 미리 드리고 나왔습니다.
제가 유학 가고 나면 저와 연락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한 어머니께 가장 특별한 선물.
그건 바로 어머니의 홈페이지였습니다.
밑의 몇몇 분들도 써 놓으셨던데,
사실 나이 오십 넘어서 컴퓨터를 배운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 깔끔하고 결벽스런 분이 가스렌지 끄는 것도 잊어 먹어서 남비 태우고,
오른손에 들은 가위가 어디 갔는지 찾아야 하고, 현관문 잠궜는지, 차 문은 잠궜는지 늘 확인해야 하다니 말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정말 적응이 안 되고, 어머니가 틀린 기억 가지고 우길 때면 같이 우기면서 골도 내고 그랬는데,
우리 교수님이 자기 방문 앞에 '방 전기불 끌 것!'이라고 메모 붙이는 걸 보고 늙는 데에는 장사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많이 배워도 '탄로'하는 것은 똑같더란 말이죠.
그래 그 이후로는 어머니가 틀리든 맞든 그냥 맘을 비웠습니다.
그냥 조용히 엄마, 틀릴 수도 있다니까, 하고 맙니다. 아직 어머니가 맞는 것도 더러 있구요.
그리고 가끔은 좀 웃으시라고 놀립니다.
"엄마 전화기 냉장고 안에 있나 찾아 봐요 ^^
"
그런 어머니가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우스 움직이는 것도 잘 못하셨어요.
"이게 왜 이렇게 막 돌아다니냐?"
인물은 30대 같으신 분이 그런 질문을 하니까 웃음이 터지대요. ^^
하나로 통신을 더블 클릭해서 인터넷을 켜기 까지 대략 한 달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엄마 바로 밑의 동생인 외삼촌의 힘이 매우 컸는데요,
삼촌이 부전공이 교육학인데다가 성품이 매우 자상하여,
지치지 않고 어머니를 가르쳤습니다.
삼촌이 어느 정도 수준에 어머니를 올려 놓자 그제서야 제가 바톤을 받아서 좀 더 알려드릴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초등학생을 못 가르치고 고등학생을 가르쳤나 봅니다 ^^
이제 어머니는 세이클럽에서 고스톱을 치시면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경지에까지 이르셨습니다, 하하하
그러나 번번이 상대방이 어머니가 52살이라는 것을 믿지 않아서 그 총각에게 확인전화까지 해 줘야 하는 상황도 발생했었죠.
제가 열불나서 대신 채팅해 준 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에 나오기전까지 어머니가 고스톱 치실 때면 항상 옆에서 훈수를 뒀거든요.
(사실 고스톱의 경기 운영 방식도 제가 가르쳤다는 ... -.- 죄송합니다. ^^ )
어머니께 제일 특별한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불현듯 든 아이디어!
어머니께 홈페이지를!!
제가 갖고 있던 어머니 사진과 가족 사진을 모았습니다. 아, 아버지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게 없어 속상했습니다.
워낙 사진을 안 찍으시는 데다 나온 건 다 이상하더군요. 할 수 없이 뺐습니다.
그 날은 운동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처박혀 어머니 홈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뭐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글 쓰고 간단하게 게시판 달고, 복잡한 기능은 제게도 어머니에게도 힘듭니다. ^^
다행히 그 날따라 식구들이 모두 늦더군요. 완성한 후 어머니 홈페이지를 메인 화면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됐다~~ 이제 고스톱 치실 때 발견하실 거야. 그런데, 그 날 따라 어머니는 고스톱을 치시지 않았습니다.
흑
그 대신 그 다음 날 일 보러 가는 제게 띠리링~ 전화가 울렸습니다.
"현아, 너무 멋진 선물이야. 보는 순간 눈물이 확 나오더라. 근데 겁도 덜컥 나고. 내가 과연 잘 운영할 수 있을까?"
처음에 홈페이지가 열리길래, 이건 뭔가 하고 보셨대요. 메인 화면을 읽으면서 오, 나랑 똑같은 여자가 또 있네.
이 여자도 나이가 많은데 컴을 배웠구나. 와, 이 여자도 여행이 취미야? 이런, 이름도 나랑 같잖아?
감탄을 거듭하다가 사진첩의 본인 사진을 보시고 깜짝 놀라셨다는
첨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우선 무슨 글이라도 써 보시라고 차근차근 용기를 주었지만,
어머니는 그냥 쳐다보면서 즐기기만 하십니다.
마치 어머니가 고급 핸드백을 선물해드렸더니 쓰지 않고 장농에다 넣어 놓고
또 보고 또 보고 하시던 외할머니처럼요.
저는 한국이 그립지 않습니다.
얼마 안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그립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한 곳이니까 미련도 없습니다. 꼭 돌아가겠다는 의지도 없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긴 세월 모시고 살았던 아까 그 외삼촌만 눈물을 흘리지 않더군요.
삼촌은 그 날까지 월급 한 번 자기 손으로 써 본 적 없이 모두 할머니께 드렸던 소문난 효자였습니다.
한국에 뿌듯할 만큼 친구도 많고,
사랑한 것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별로 그립진 않을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 만큼은 너무 그립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돌아가야 합니다.
자주 몸이 아픈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어머니가 먼저 저더러 나가라고 하셨죠. 여기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고.
어머니가 그렇게 말해 주시지 않았으면
저는 아직도 그 곳에서 쳇바퀴 도는 햄스터처럼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머니에게는 살을 깎아 내는 것 같은 용단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참 강인하고 위대한 존재입니다.
집을 방문해서 저를 격려해 주던 어머니 친구들, 그리고 제 친구들 모녀 간에 헤어질 것 마음 아파 대신 울어 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희 모녀는 그리 눈물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떠나던 날 아침, 공항에서 근사한 한식 아침 마지막으로 먹자던 계획이
멍청한 항공사 직원이 시간을 다 까먹는 바람에 무산되면서, 서둘러 이별해야 하면서, 결국 참았던 게 터지고 말았습니다.
"떠나세요, 더 넓은 세상으로."
멋지게만 보이던 아시아나 광고 카피가 너무 서럽게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끌어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어머니는 제 머리를 쓸고 또 쓸으며 '내 새끼... 내 새끼..."만 되풀이하셨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서러운 한 마디 '내 새끼'가 너무 가슴을 흔들더군요.
아버지는 생각하면 뭉클한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늘 눈물이 나는 사람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흙을 밟으면 다신 울지 않을 거야, 결심했지만
이 곳에 와서도
변함없이 어머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그렇게 애착 갖던 자식 떼어 놓고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프지는 않을까, 혼자 있는 저녁 시간에는 울지 않을까, 나랑 채팅 마치고 나면 또 한숨 쉬고 울진 않을까.
원래 한국에 있었으면, 이미 7일 밤에 목욕탕에 커다란 꽃다발을 숨깁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짠~! 하고 어머니한테 새벽 같이 보이는 거죠. 그러면 어머니가 아니 어디다 숨겼어? 하고 좋아하시고.
엄마, 큰 딸 카네이션 없는 어버이날, 다섯 번만 견디세요. 꼭 더 큰 사람이 될게요.
어머니는 박사 따기 전에는 돌아오지도 말라 그러셨습니다.
저도 여느 사람들처럼 특별히 가진 것이 없지만, 신은 제게 커다란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제 삶의 원천이 되는 남달리 훌륭한 어머니십니다.
공항을 떠나면서 어머니에게도 말했지만,
저는 어머니 딸이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그 사실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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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시련들과 난관들이 저를 기다리겠지만, 그래도 전 굴하지 않을 겁니다. 제 뒤엔 항상 어머니가 계시니까요.
저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제게 어머니는 또 다른 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아쉬움 없이 사랑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