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축구를 즐겨 보시는 독자 분이시라면, 어느 순간부터 선수들 가슴팍에 붉은 색 모양의 무엇인가가 추가된 것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맨체스터 시티의 팬인데,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도 영국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들을 자주 보고는 했습니다.
당시에는 저 붉은 색 상징을 가끔씩 tv에 나왔다가 사라지는 문양이라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았었는데, 영국에 유학을 처음 오고 약 2개월 정도가 지났을 11월에 영국 각지에서 저 문양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 포피란?
우선 저 붉은 문양의 정체는 "붉은 양귀비꽃(Poppy)"입니다. 일반적으로 포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붉은 양귀비꽃은 전쟁터에서도 살아남는 강인한 꽃으로 11월에 영국 전역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정부 관련 기관은 물론 일반 대중들도 11월이 되면 널리 포피를 착용하는데요. 이는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영국군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상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에서의 11월은 우리 호국보훈의 달 6월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이 영국의 현충일(Remembrance Day)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포피가 전쟁의 상징이 된 계기
1914년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수 많은 국가의 수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참전했던 캐나다군 장교 존 맥크래(John McCrae)는 "개양귀비 들판에서"라는 시를 발표하며 양귀비꽃이 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개양귀비 들판에서
이 시에서 맥크래 중령은 전쟁터에서 피어난 붉은 양귀비꽃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습니다. 이 시는 전쟁의 참상과 희생에 대한 감동적인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에 따라 붉은 포피가 전쟁의 비극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상징으로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한편, 포피가 특별히 영국에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상징으로 발돋움한 것은 1921년부터였습니다. 당시에 이미 붉은 포피는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고, 이에 1921년, 영국군 사이에서 Poppy Appeal이라는 기부 캠페인이 시작된 바 있습니다. 이 캠페인은 붉은 포피를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참전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지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이 행사로 인해 붉은색의 포피는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감사와 기억의 표현으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3.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포피
11월의 영국에서는 포피를 가슴에 단 사람들을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습니다.
또한, 할로윈이 끝난 11월의 영국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여기저기 설치되기도 하는데, 이와 함께 붉은색 포피도 길거리, 상점가, 학교,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장소 등 여기저기서 볼 수 있습니다.
길거리에는 포피를 파는 포피 셀러들도 많이 목격되는데, 약 2파운드 정도의 가격에 포피 장식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축구 경기에서도 선수들의 유니폼에 포피 그림이 프린트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4. 포피의 의미 확장
2014년 박근혜 대통령도 영국 국빈 방문 당시 포피 장식을 착용한 바 있습니다.
지난 11월, 윤석열 대통령은 영국 국빈 방문 당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무명용사 기념비에 헌화한 바 있고, 영국 국방성 앞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비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이 때 당시에도 포피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포피는 1차 세계 대전 뿐만 아니라 영국군이 참전한 모든 전쟁, 나아가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에 대한 애도, 감사, 기억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포피를 착용하면서 흉포한 전쟁의 고통을 되새기는 것을 넘어 전쟁과 관련하여 희생된 모든 이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보존하며, 미래 세대에게 전쟁의 비극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상징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5. 포피를 둘러싼 논란, 착용 거부
포피를 둘러싼 논란은 포피의 의미가 확장됨에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12세기부터 무려 700여년 간 아일랜드를 지배해온 바 있는데, 이 아일랜드가 1922년에서야 비로소 독립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전체가 독립한 것은 아니고 총 32개 주 중 남쪽의 26개 주 만 독립에 성공했습니다. 그 중 북쪽의 6개 주는 독립하지 않고, 영연방에 남게 되었고, 이것이 지금의 북아일랜드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의 통일주의자(남북 아일랜드의 통일 지지)들과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자(영연방 존속 지지)들 간의 갈등이 대두되었습니다.
또한, 북아일랜드 내에서도 남북 아일랜드의 통일을 목표로 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왕당파 및 영국군과 대립을 하게 되었는데, 이 갈등은 1960년대 말부터 1998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이 갈등을 북아일랜드 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당시 북아일랜드의 독립 및 아일랜드 통일을 목표로 한 IRA는 런던에서 테러 행위를 하는 등 극단적인 모습도 보였는데, 이에 영국 정부군이 강경하게 대응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북아일랜드 주민들, 또 영국군의 아일랜드 탄압 행위에 반발하는 다른 영국인들도 이러한 이유로 포피 착용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포피를 영국의 제국주의와 군사적 행위를 옹호하며 상징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6. 갈등에서 평화와 감사에 주목할 때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반성하고, 감사와 평화의 상징으로 채택된 포피마저도 갈등의 매개가 될 수 있는 모습을 보고 참담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자기 주관을 뚜렷하게 가지고 평화와 감사에 주목할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