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부지는 내가 두 살배기일 때 미국으로 발령이 나서 2년간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빽빽 울어대는 딸내미와 혼자 씨름할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는 매일 편지를 쓰고 일주일치 7개씩을 모아서 보내셨다고 한다.
내가 중학생일때 우표수집이 취미였던 나는
그 시절 아부지께서 부치신 미국우표가 그렇게 탐이 날 수가 없었다.
한 박스를 가득채운 편지들은 결국 철없는 딸내미의 욕심에 의해 1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우표만 뜯어가겠노라 약속을 했지만 봉투 속이 여간 궁금한게 아니었다.
결국 하나 뜯어 본 봉투 속 편지는 하얀, 백지였다.
한 장 곱게 접힌 편지는 백지였다.
혹시나, 다른 봉투도 뜯어보았지만 모두 백지 편지지 였다.
쉼표 하나, 물음표 하나 없는
하루도 빠짐없이 백지를 곱게 부치신 아버지.
철없고 욕심많은 딸내미는 그런 아버지를 의아해 하며 의심했다.
아빠는 편지를 쓰는 것이 귀찮았던게 틀림없어.
그랬던 딸내미가 10년이 지난 오늘, 백지 한장을 곱게 부치고 왔다.
20년 전, 지금보다 20년 젊었던 아버지의 마음처럼.
그 편지들은 하얀, 백지였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그리움이 하얀 것이었다.
검은 편지지를 새하얗게 만들 만큼의 그리움으로 쓰여진 700통의 편지.
-2007년 어느 여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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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프랑스든 30초만에 원하는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할 수 있고, 인터넷만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로 내 눈 앞에서 볼 수 있으니까 말이죠.
편지할께요..
그러면 편지는요?
위의 글은 2007년 한 여름 어느 날, 제가 쓴 일기입니다.
1년간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 저는 불안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있을까.
우리에게 무슨 인연이 있어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그러던 때에 아버지의 백지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2살 때 2년간 미국 출장을 가셨던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부치신 수 많은 편지들,
아버지께서는 매일 매일 편지를 쓰셨다고 하셨어요.
그때는 미국에서 전화를 거는 것도 너무 비쌌고, 화상채팅은 꿈꿀 수도 없었지요.
그래서 그때는 ‘편지’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그 몇백 통의 편지 속에 30통 가량의 ‘이상한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백지편지’,
정말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편지들.
저는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리움이 너무 짙어서 차마 아무 말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29살의 젊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25살의 젊은 딸도 백지편지를 부치고 왔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
저는 제가 보낸 것과 같은 백지편지를
그 사람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아마도 그 때인 것 같습니다.
이사람이라면 평생을 같이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화, 화상채팅..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사랑하는 사람, 보고싶은 사람과 말하고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내 본 기억이 있습니까?
지금 전 세계에서 부모님을 떠나, 친구를 떠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공부를 하고
있는 많은 분들, 오늘 편지를 쓰는 것이 어떨까요?
그 편지가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또는 그 편지가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도착할 때 까지 그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요,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