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스트리아 린츠 요하네스 케플러 대학교 (Johannes Kepler University)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중인 지구촌 특파원 6기 샤치재화니입니다!! 오늘 포스팅의 주제는 오스트리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소개입니다.
냉전 체제 이후 오스트리아는 미국, 소련 어느 곳의 통제도 받지 않는 영세 중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세 중립국 오스트리아는 경제, 영토, 세력 등 많은 면에서 세계의 변방, 유럽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따져보면 합스부르크 왕가, 즉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유럽의 중심이었던 최강국이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국의 역사
'합스부르크 가문'은 본디 알프스 언저리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소규모 가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귀족 가문 에티호넨의 방계 가문으로서, 에티호넨의 손자 라트보트가 스위스 합스부르크에 자신의 성을 건설하고 백작의 지위를 받으면서 합스부르크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손자인 오토가 합스부르크 백작을 칭하면서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이 시작되었죠.
(신성로마 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명의 선제후)
13세기 유럽은 혼란의 시대를 맞이 하였습니다. 대공위 시대(Great Interregnum) 시대라고 불리우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자리가 20년 동안 공석인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황제와 교황의 극심한 세력 다툼, 휘하 영주들의 황제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내전의 결과였습니다. 20년 동안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나라는 막장으로 흘러 갔고, 교황과 유력 제후들 모두 새로운 황제의 옹립이 필요하다는 데에 합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다만, 힘이 있는 유력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ㅇ에 힘이 없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선출되게 됩니다. 황제가 된 루돌프 1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적극적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는 오늘날 오스트리아 지역을 보헤미아 왕국으로부터 뺏어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스위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중심은 알자스 일대에서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역으로 변화합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하면 떠오르는 '결혼 동맹'을 통해 자신의 가문의 세력을 확장해갑니다. 결혼을 통해 세계를 정복한 합스부르크라는 말이 있지요. 합스부르크 왕국은 부르고뉴 공국, 스페인 왕국, 보헤미아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왕국들과 결혼 동맹을 맺었는데 기적적으로 이들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되면서 이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가 그래도 흡수하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국하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여제입니다. 그의 아버지 카를 6세는 아들을 낳지 못해 자신의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계승을 금지한 법(살리카법)을 어기면서 자신의 딸이 제위를 계승하도록 국사조칙을 공표합니다. 그러나 카를 6세 사후, 주변 국가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반대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난세를 성공적으로 이겨내고 합스부르크 왕국의 여제로서 훌륭한 정치를 펼칩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몰락은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이 깊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발칸 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하였고, 이는 오스만 제국, 러시아 등 다른 강대국들과, 발칸 반도의 많은 독립적인 민족들과의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이로 인해 결국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황태자가 암살 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합스부르크의 시대는 막을 내렸고, 합스부르크는 일세를 풍미한 전설적인 가문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tmi : 주걱턱
"행복한 합스부르크여, 그대는 결혼하라!" 합스부르크는 결혼을 통해 동맹을 다지는 식으로 가문과 제국을 번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는 근친혼을 유발하였으며 삼촌과 조카가 결혼하는 등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유전병을 가진 후손들이 대를 잇게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유전적 결함을 대표하는 사례는 바로 주걱턱입니다. 특히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이러한 문제점이 도드라지는 데요, 합스부르크 주걱턱은 치아 구조를 포함한 턱의 구조를 기형으로 만들어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음식조차 삼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근친혼의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는 지적장애 및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고요.
합스부르크의 흔적
합스부르크는 세계를 호령했던 오스트리아의 대가문이었습니다. 그로인해 여전히 오스트리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세계 문화 유산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그 옛날 합스부르크 시대의 정취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합스부르크 왕들의 공식 주거 공간이었고 현재는 빈 미술사 박물관, 국립도서관, 주요 박물관과 대통령 집무실로 이용되는 호프부르크 왕궁, 구스타프 클림트의 역작인 '키스'와 반 고흐의 명작 '오베른의 평원'을 볼 수 있는 '벨베데레 궁전', 합스부르크 왕족들의 여름 별궁인 쇤브룬 궁전 등 비엔나의 다양한 문화 유산들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TMI 하나 : 합스부르크 장례식
합스부르크에 대해서 조사하다보니 한 가지 흥미로운 영상을 발견하게 되어서 TMI 느낌으로 첨부합니다...!
합스부르크의 전통 장례 의식 절차를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합스부르크 황실 묘지에 들어가기 위해 수도사에게 수없이 많은 화려한 칭호를 겸비한 '오스트리아 황태자'라고 소개를 하면 거절 당합니다. 두 번째로 간단히 '합스부르크 대공'이라고 소개해도 거절 당합니다. 오로지 '루돌프'라는 이름, 가여운 죄인으로 소개해서야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아무리 찬란한 인생을 살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평등한 인생의 가르침을 합스부르크의 장례 의식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가장 찬란한 부와 명예를 누린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일개 죄인을 뿐이군요.
합스부르크 왕국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 세계 각국에서 관광객을 유치하는 문화유산을 제공한 오스트리아인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물론 합스부르크 제국 자체는 다민족, 다국가 제국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오스트리아 만의 역사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업적, 대중문화적 의미에서 오스트리아인들의 정체성 향상에 기여하고 있지요.
교환을 목표로 하는 국가의 역사 문화 사회에 대해서 공부해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궁금하신 사항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상 샤치재화니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