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석/박사생활 하면서 느낀게 있다면, 인간관계 역시 논문을 쓰는 실력만큼이나 커뮤니케이션을 잘 해야 된다는 겁니다. 계산적으로 해야 한다는게 아니라, 내 급박한 사정과 상황이 있다면 내 생각만 가지고 상대와 의논을 하지 않고 움직이는게 아니라,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거죠.
오랜시간 신앙생활 해 오신것 같은 문체를 보면서 좀 답답한 마음도 느껴집니다. 전형적으로 늘 상황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본인과 신 위주로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사고방식이 있으시네요 (저도 꽤 긴 기간을 글쓴분과 같이 생각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본인은 스스로 모진 상대의 반응을 미워했다가 마음대로 용서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셨는데, 그건 본인에게 제일 해가 되는 생각입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본인이 그 상황에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발견하실거고,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게 필요했고 중요했습니다. 근데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셨네요. 글쓴분이 행동하신 "프로세스"는 "자존심만 앞세우고"생각해서 결과적으로는 상대가 볼때 매우"기회주의적인 선택"을 내린것 입니다.
미국은 신뢰가 중요한 동네 입니다. 제가 그 상황이었다면, 교수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교수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물었을 거고, 나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 하신다면 저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서포트해줄 수 있는 다른 랩을 알아보겠다고, 그것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없겠냐고 물었을거에요. 그리고 그동안 나를 신경써주셔서 감사하다고 꼭 이야기 했을거고요. 매정한 교수라고 하더라도, 당신이 도와줄 수도 없고 내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옮겨 가는게 합리적인 마지막 선택이라는 건 이해하고, 그래도 "감사"해 한다는 점에 있어서 떠날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아무말 없이 몰래 다른 랩을 알아보고, 배신감을 느끼는 교수에게 "당신이 내게 협박을 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건 오히려 신뢰를 무너뜨리는 언행인 셈이죠.
어떤 생각이든, 마음이든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겁니다. 때때로 내 상황을 알리고 필요한걸 요구하는 상황을 "자존심을 구기고 구걸하는 행위"로 잘못 받아들이고 글쓴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그걸 자존심 상해 하고 구걸하는 행위라는 생각을 버리는게 제일 중요한것 같습니다. 미국애들 잘 관찰해 보면, 항상 교수에게 자기 상황을 잘 알리고, 본인이 필요한것과 필요 없는것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을 분명히 하고, 교수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항상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 과정을 자존심 구기고 구걸하는 행위로 인지하지 않고,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본인의 권리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충분한 대화를 하지 않고, 그동안 조금이라도 기회를 주고 챙겨주신 부분에 대해서 감사해 하는 표현 없이, 협박을 받은 스트레스가 있다는 이유로 말없이 타랩실을 알아보면서 일을 진행을 시켜버렸다면, 아무리 인심좋은 교수라도 배신감 느끼고, 괘씸해 하고 분노할 일이거든요. 머리로는 학생이 불안하고 급한 상황이라는걸 이해는 하지만, 그 과정이 교수를 "이용"만 하고 버리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이런 본인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교수가 자신을 방해하고 미워했다는것만 생각하면서 용서하네, 불쌍하네 라고 말하는건 사실 굉장히 이성적이지 못한 사고방식으로 보입니다.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편딩을 자른다고 협박하셨던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이해타산을 따지는 분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책잡힐 행동을 안하는것이 안전한건데, 그 본인의 행동들이 굉장히 미숙했던것 같습니다.
또 집안 사정이 어렵고, 펀딩없이는 공부하기 힘든거.. 웬만한 금수저들이 아닌이상 다 비슷합니다. 본인만 유달리 힘든 상황이었고 어려운 상황이었던게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에 집에서 더이상의 서포트를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펀딩 없이 1년정도 버틸 자금이 있었던 적이 있다는것도 일반적인 박사과정 학생 눈에는 "많은 여유자금이 확보된" 상태로 보입니다. 학교에서 펀딩 자르면 버틸 자금이 없는 학생들이 수두룩 할거에요. 그러니 펀딩이 잘릴 상황에서는 그만큼 급박하게 펀딩제공이 가능한 교수님을 알아보는것도 꽤 비일비재한 일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언행만 있다면 누구와도 나쁜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박사과정 고학년이신것 같은데.. 지금의 지도교수님은 가능성이 많지 않은 논문에 대해서 "사실"을 이야기 해 주신것 뿐이고 글쓴분의 말처럼, 미워하시는게 아니라 실망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쨌든 여러 랩실에서 경험이 있고, 논문을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뽑고 돈주고 공부시켜준건데, 논문을 생산하는 기준이나 스킬이 기대에 못미치니 당연한겁니다. 방법은 스스로 분발하고 더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는 없겠네요.. 리서치는 결국 본인이 해야하는 부분이니 스스로 제대로 결과를 내는 수 밖에 없죠..
마지막으로, 제 글이 잔인하게, 주제넘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연구를 하고 싶은 분이라면, 학계에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런 실수를 고치는게 정말 중요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 버티신것처럼, 앞으로 꼭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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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으로 세상을 단순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 보았던 한
철없는 소년이었었다. 그리고 미국에 정착한 외가댁 덕분에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일찍 알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에서 수입된 좋은 외화들이 많았는데 그것들을 통해 나는 미국에 대해 좋은 시민들이 많이살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나라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학교 어느날 우연히 보게된 희귀질병관련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생물이란 세계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치료할수 있는 연구를 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처음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우수한 학생이 아님임을 깨달았고, 남들이 취업이 그나마 수월하다는 전공이 있는 대학에 진학해 한 지방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또 아버지가 그 학교를 마땅찮아 하셔서 서울에 있는 학교로 편입해서 거기서 같은 전공을 계속하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게 나의 학업목적중 하나였었다. 창피하지만 그랬었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전공이 내 적성과 맞지 않다는 내적갈등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우연히 찾아온 전공관련 기업에 입사하여 경험해보니 너무 나와 맞지 않는거였다. 나는 졸업을 하면서 새로운 전공으로 유학을 나가고자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분야로 생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왜 대학원을 가지않았냐고 할지 모른다. 당시
생물에 대한 연구는 키스트나 카이스트, 포항공대정도였던것 같다. 그런곳에들어가서
연구를 해야 경제적인 지원도 좀 받으면서 질좋은 연구를해서 인정 받을수가 있었다. 하지만 생물경험이 전무한
나에겐 그곳 대학원 입학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전공을 완전히 바꿔가는것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도 커서 다른 대학으로의 입학도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일단 미국 유학을 나와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학부시절
교수님들의 생각과달리 똑똑한 사람들만 유학을 가는게 아니라고 믿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고 연구에 대한 진심이 있다면 더
잘할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그걸 증명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부모님 도움을 받아 어학원생으로 나와 영어를 공부하면서 학교관련 정보드들을
수집하며 영어회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생물수업학점을 따면서 본격적으로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해도 아버지는 내가 당연히 학부관련 전공으로 갈줄 아셨다가, 나중에 내가
생물학과로 석사입학을 준비하는걸 보고 매우 나를 질책하셨다. 나보고 미쳤다고도 하셨다. 도와주시지 않으셨다. 그만두고 귀국하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내 꿈을 포기할수 없었기에, 난 학교에 등록하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와
한참동안 갈등관계가 시작되었다. 약 반년정도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첨예한 갈등관계였었다. 그러다 차츰 마음을 열고 아버지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다.
억울하게 회사회장에게 이름만 명예퇴직인 사실상 해고를 당하신이후, 아무리
노력해도 관련 일로 재취직이 불가능하셨다는거다. 그렇게 삼년여가 흘러가답니 결국 집안의 돈은 말라갔고 집도
처분해야할 상황에 놓이셨던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전혀 듣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저 ㅏ아버지가 그저 내 꿈을 반대하는것만 원망스럽게 봤던것이었던거였다. 나중에 그말을 들었을때
너무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석사시작부터 돈을 어떻게 모아 학비를 낼지 관심을 두어야만했다. 교내 서점 알바도 지원했었지만 시간대가 맞지않아 불러주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알아보고 다니다보니, 리서치 랩 일에 차츰차츰 난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stipend를 받으며 다닐수 있다는 박사과정에 대해 듣게 되면서 랩 교수님 몰래 그 학교들에 지원하게 되었다. 집에서는 돈으 완전히 끊은 상태라 일년도 버티기 힘든 상황이어서 다른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막 들어간 랩의 교수에게 처음부터 구차하게 돈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었다. 돈구걸하는 거지같은 모습으로 보이는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말씀도 드리지 않고 이 모든일들을 혼자서 준비해서 진행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결국 나중에 교수님이 나의 이런 행적들을 아시고 날 매우 괘씸하게 여기시게 되었다. 당장 랩미팅에서 그 여파는 드러났다. 내 리서치 발표때 여러 랩멤버들앞에서 공개적으로 어려운 질문을 해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창피를 주었다. 그후로 별로 큰일이 아닌데도 랩일에 소홀하다면서 두번이나 경고를 주더니 세번째 경고 받으면 알아서 나가라고 종용했다. 그말을 듣고 며칠간 생각을 해봤다. 날 미워하는 교수님 밑에서 더이상 일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나는 교수님사무실을 찾아가서 그간 있었던 일들과 경제적 사정들을 모두 말씀드리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랩을 정식으로 그만두었다. 미련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새롭게 RA를
찾던중 나는 생각지도못한 학과에서 리서치 기회를 찾게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여름에 일해서 작지만 학비에 큰
보탬이 될만큼의 돈을 모을수 있었다. 또 일을하다보니 관심이 생기게 되어서 거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후에 더이상 나에게 돈을 벌수 있는 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중 우연히
생물관련 도구들을 이용해 연구일을 하는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분이 내 석사지도교수였다.
비록 생물학 리서치는 아니나 관련 경험도 배울수 있어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분 지도하에 정말 열심히 일했고, 일년뒤에 운이 닿아 RA도 받을수도 있게 되어서 졸업때까지 매학기에 낼 돈액수만큼은 벌면서
학교를 다닐수 있게 되었다. 참 기적같은 일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분 밑에서 열심히 밤낮가리지 않고 그분일조차도
내 프로젝트인냥 여러가지 일들을 했었다. 그리고 난 무난히 졸업을 할수 있었다. 하지만 논문하나없고 경험이 여전히 많지 않은 내가 최상위
학교는 불가능했다. 다만 풀펀딩을 보장하고 외국인 학생지원에 관대한 주립대에 입학해서 공부하기로 했다.
모든게 참으로 순조로워보였고 나는 박사과정에 대한 청사진을 나름대로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 경제위기라는 다른 변수가 찾아왔다. 주정부의 재정지원이 줄어들면서 주립대학교의
외국인 학생 tuition waiver정책, 그리고 학과지원정책도 많이
바뀌게 되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나를 비롯해 인터네셔널 박사과정생들은
이제 더이상 프로그램에서TA를 더이상 보장해주지 못하니 알아서 찾아라는 말을 들었다. 또 RA를 받을경우는 nonresident tuition까지 무조건 지도교수될 분이 보장해줘야한다고 한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나는 화낼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수십명의 교수님들을 컨택하고 만나보며 랩로테이션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하지만 한결같이 로테이션으로 받아줄수 있지만 자기네랩의 학생으로 받아주긴 곤란하다는거였다. 내가 영주권자가 아니란 이유에 tuition waiver로
nonresident tuition을 내야하는데 그걸 내줄 만한 돈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TA도 원래 지도교수가 정해지면 그 교수의 과목을 가르치는것인데 교수님을 찾을수가 없으니 TA찾는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교수가 안정해지면 돈못받고 그때는 자비로 학교를다녀야 했지만, 지난 몇년간 간신히 RA로 돈을 모아 석사를 마친 나에게 그런 여유돈이 남아있을리 없었다.
당장 일년뒤에 있을 첫학기는 몰라도 그이상은 내게
무리였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1년안에 날 받아준다거나 TA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교수도 찾기 힘들었다. 교수를 찾을수 없다는 사실을 보면서 난 생각했다. 어차피 1년뒤에 떠나느니
가능하다면 일찍 다른 기회를 찾아 떠나자고.
그래서 다른 학교랩을 컨택하게 되었다. 정말 운이 좋게도 다른 학교의 교수밑에서 일할 기회를
찾게 되었고 한달후 바로 그리로 가게 되었다. 그분도 날 마음에 들어하셨고 나도 그분리서치에 관심을 적극
표명했다. 모두 순조로워보였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다른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서둘러서 급하게 그 랩을 찾는바람에 그 교수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것이
내게 큰 화로 돌아올줄 그때는 몰랐었다.
옮겨온후 한달뒤에도 나는 아직 여전히 낯선 주변적응도 잘 안되던 상태였다, 랩일의
분야도 전혀 해보지 않았던거라 너무 생소해서 생각보다 빨리 배울수가 없었다. 게다가 듣는 수업들도 많아 정작
리서치일을 할 여유가 많이 남질 않았다. 주어진 실험 프로토콜자체에 원래 문제가 있었는지 아무래 지시대로 실험을 해도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수가 없었다. 따로 저녁에 밤에 시간을 내서 아무리 실험을 반복을 하고 연습을
해봤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되지
않는거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사이에,
내 일의 진척이 더디다는 이유로 교수님은 당신께서 생각한만큼 리서치 결과물을 뽑지 못한다면 나가라고 나에게 돈으로 협박을
하기시작하셨다. 그이후부터 나는 매일
밤마다 스트레스로 혈압이 올랐고 속상해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외롭고 힘들었다. 새로운곳에 온지 얼마안되서 아는사람도 없어 고민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
쫓아내겠다는 교수의 말에 겁을 먹은 나는 그전에 미리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단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랩들을 컨택하고 알아보았다. 그래서 한 교수님과 이야기도 나눴었다. 하지만 곧 그 일의 진행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닌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학기가 끝나고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나는 여름휴가 열흘동안 랩을 떠나 여행을 갔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날 바라보는 교수의 시선은 무척 싸늘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가 자신도 모르게 다른랩을 아아본다는것을 안 교수가 배신감을 느끼고, 나도 모르는사이 포닥구인을 하고 인터뷰까지 준비하고 있었던것이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일에만 전념하고 뭔가 진척이 된다는 느낌이 들 시점이었다. 그렇게 2 주가 지난뒤에 교수가 갑자기 한창 일하느라 바쁜 나의 일을 막으면서 지금당장 면담을 해야하겠다고 하시는거였다. 덕분에 하던일은 망쳐버리고 말았다. 한편, 내가 미팅방에 들어서자마자 취조하듯이 날 노려보면서 물었다. 내 랩을 떠날 생각으로 다른랩 컨택한게 사실이냐고. 이미 내가 한 일을 다 알고 확인질문하는것이었다. 난 먼저 그분의 상태를 살폈다. 그분의 얼굴을 보니 화를 추스르면서 말을 하는것 같아보였으나 얼굴 전체가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땀도 흐르고 계셨다. 그러게 나에게 화가 많이 나신것을 전혀 감추지 못하시는거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내가 이 상황에서 그분에게 무엇을 말할수 있을까라고. 내가 다시 마음을 돌이켜서 당신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해도 진심을 말해도 있는 그대로 들어주지 않을거란걸 난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잠시 눈감은동안 모든 생각이 스치고, 기도를 올린후, 난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날 쫓아내겠다는 당신말에 겁먹고 랩을 알아보러다닌게 사실이라고. 그리고 다른 말은 더이상 덧붙이지않았다. 그런 나의 예정된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듯이, 교수는 내가 랩에 더는 있을수 없다며 나가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덧붙여 말씀하시는게 날 참 무섭게 했다. ‘너 말고도 지난번에도 너처럼 들어왔다가 나간아이들 많았는데 너도 나가라’ 이렇게 말씀하시는거였다. 그 말때문에 난 정말 잘 알게되었다.차라리 이렇게 쫓겨나는게 오히려 내가 더 큰 화를 피할수 있게 된일인지도 모른다고.
랩에 남아있는 일은 마무리해야겠단 생각에 일주일정도 그곳에서 더 일을 하고서 내 자리를 깨끗하게 뒷정리하고 난 랩을 미련없이 나왔다. 그렇게해서라도 적어도 내가 그곳에서 일할 마음으로 여름휴가후 다시 랩에 돌아왔었다는걸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후 나는 다른 랩들을 부지런히 학교내에서 알아보고 다녔다. 어렵게 옮겨온 학교까지 떠나고 싶진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 교수는 내가 랩을 알아보는걸 계속 방해를 했다. 처음에 좋에 이야기가 진행되던 다른 교수님이 갑자기 펀딩이 부족하니 안된다며 미안하다며 떠났다. 또 다른분은 느닷없이 자기 학과의 TA자격을 언급하면서 나는 자격이 안되니 자기랩에 들어올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셨다. 다른 어떤 교수는 자신의 랩에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위치조차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이메일 보낸 당일날 자기 집무실에서 미팅시간 30분만 주겠으니 오고 싶으면 와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교수가 어디있는지 알길이 전혀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으셨고 이메일해도 답도 없었다. 사실상 만남의 거절이었다. 나는 그런 그분의 태도에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어쩔수 없었다. 이렇게 알게 모르게 랩알아보는 일들이 틀어지는것을 보면서 나는 날 방해하는 그 교수가 한동안 죽도록 미웠었다. 하지만 곧 내가 그분에게 드린 배신이란 마음의 상처를 이해못하는바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다. 그리해서 난 그 학교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떠나고 나니 죽도록 미운 사람이 참으로 안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에게 상처주는 자신을 보지 못하고 학생의 배신당했다는데 대한 불편한 감정에 나에게 복수아닌 복수를 한 교수가 안스럽기까지 했다.
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다시
GRE와 토플, 그리고 statement를
준비했다. 지원도 시작했다. 하지만 석사지도교수님은 더이상 예전처럼
날 도와주시지 않으셨다. 그동안 내가 학교를 옮겨가면서 너무 도와달라고 그분의 기분은 상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계속 연락드렸던것이
감정을 상하게 했던것이다. 나의 행보로 인해 상대방 학교의 교수님들과의 입장도 많이 난처했었으리라 생각도
들었고, 또 나에 이런 모습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크게 실망한것도 있으신것 같았다. 이미 지나버린일들이라 돌이킬수는 없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나는 좋은 학교든 낮으학교든 가리지 않고
아루런 이유도 듣지 못한체 바로 리젝을 많이 받았다. 이전에 학교 지원할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참담한 결과들이었다.
그렇게 3월초가 되서 입학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난 거의 포기할 상황까지 이르렀다.
집에서 아버지도 지치셨는지 이제 그만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막노동을 하든 내가 살고싶은대로 멋대로 나가 살라면서 체념하셨다.
그래서 난 한동안 많이 맘이 지쳐있었다. 그러다 문득 기도하면서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완전히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그러고서 우연히 랩 사람 차즌 공고를 보고
연락을 했다. 의외로 이야기가 잘 되었다. 해당 학교와 프로그램을 찾아
지원하였고, 나는 감사하게도 그곳에 입학할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박사과정중
생각지 못하게 2-3년차때 갑자기 찾아온 건강문제들로 인해 난 많이 심신이 힘들었었다. 석사때와 달리 매우 의욕적으로 마음먹은만큼의 몸편히 마음편히 리서치 활동을 많이 하지는 못했었던것도 맞다. 그러다보니 다른동료들과 달리 co-author
paper하나 외엔 나만의 독자적으로 쓴 저널 페이퍼가 아직 없는 상태다. 내가 최근까지 만든 데이터들도 뽑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든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단 저널에
내는걸로 준비를 해서 보여드렸더니, 데이타가 너무 적고 빈약하다면서 낮은수준의 1.0
impact factor 저널에도 못낼지경이라고 혹평을 하시는것이었다. 너무 충격받아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날 하루를 보냈다. 내 나름대로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바로 일을 참 많이 시작해서
만들 결과였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보니 그게 교수님이 내가 미워서 그런말씀 하신게 아니라,
한문의 세계는 바로 그 보여지는결과물로 판단한다는 냉정한 곳임을 그 시각에 근거해서 말씀하신것 뿐이었다는거다.
데이터가 너무 적다는것이 맞는말씀인데 내가 무슨말을 할수 있었겠는가. 그저 많이
열심히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나는 자리를 나왔다. 나와 언쟁하면서 힘드셨던지 그분도 그날이후 며칠간
몸이 아프셨던것 같았다. 만일 날 진작에 포기시킬 생각이었으면 몸이 아프다 그럴때 진작에 랩에서 나가라고
그랬을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나름대로 일도 도와주시고 지도도해주신 교수님의 진정을 내가 모르고 그저 좀
맘상하는 말했다고 틀어져선 안되겠다고 난 생각했다. 오히려 정말 감사한 일이 아닐까라고. 그런 그분의 고마운 마음을 난 기억하면서 더 분발해보려고 한다.
이렇게 나는 내게 일어난 이 모든 좋고 나쁜 일들과 과정들이 내게
분명히 필요했기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진정 무엇을 원했으며, 또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잘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뼈저리게 느낀 진실이 있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향해 뭐라고 평가를 하든, 나 자신은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할줄 알아야한다는것이다. 나는 이제 그런 마음으로 내가 소년시절 꿈꿨던 과학자의 길을 밟아가고 싶다. 그 첫마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