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박사생입니다.
날은 좋은데 몸은 지치고 며칠 집중했더니 완전히 번아웃 되었네요.
그냥 지금까지 느낀점이나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겪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들.
# 먼저 가장 이상적인 인문학 박사생의 박사 받기 과정.
박사 시작부터 꽤 구체적인 연구 주제가 정해져있고
그 주제에 따라서 지도 교수를 정했으며 (지도 교수의 세부 전공)
지도 교수의 지적 도움과 다른 행정적 도움을 바탕으로
오로지 그 구체적인 주제에만 집중하여 논문을 작성한다.
요새는 250 페이지를 넘는 논문도 거의 없으니 코스웍 포함 대략 5-6 혹은 7-8 년 걸리겠지요.
이게 이상적인 박사 받기 인 것 같습니다.
# 경험에서 제가 배우고 깨달은것.
1. 박사 논문 주제 잡기
"나는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고 싶어,
나는 할 수 있어,
지금까지도 몇년 박사생활 잘 해왔잖아,
이 새로운 분야를 선점하면 취직도...잘.. "
이런 마인드면 안됩니다. ㅜㅜ
논문의 주제는 가급적 이미 오랜 동안 충분히 논의가 되어있는 것,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이나 해석들도 충분히 검토가 된 것을 정하는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 문학 혹은 문화 이론에 관해서 쓰는 것보다
중세나 근대에 관해서 쓰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서로 다른 해석들이 너무 많으면 그것들을 모두 박사생 자신이 읽고 분석해야 하는데
문제는 분석의 틀 또한 다양하니까.. 읽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시간이 든다는 말이죠.
혹은 본인이 석사때 충분히 공부한 것의 확장도 좋습니다.
선구자는 60세쯤 되었을때..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참고 문헌들이 박사 논문을 쓸 정도로 이미 모여있는 주제를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블리오그래피는 인문학에서 이를테면 독특한 대물림 같은 것인데
특정 주제에 관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목록들입니다.
이렇게 비블리오그래피를 뽑을 수 있는 주제를 택해야합니다.
아무리 주제가 현대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연구자가 폭증한 분야가 있습니다.
그런 분야는 상대적으로 연구들이 잘 되어있습니다.
현재 비블리오그래피에 30개 정도의 책과 논문이 있다.
나머지 100여 개 정도는 내가 직접 연구하여 그 주제에 연관시키겠다....
시도는 좋습니다만, 죽을때까지 완성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학제의 이론들을 내 것으로 가져와서 그것을 어떤 사회 현상이나 작품에 적용하겠다..
박사 과정생은 푸코나 데리다가 아닙니다. ㅜㅜ
게다가 논문 주제를 정하는 것은 논문의 질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줍니다.
주제가 많이 반복되어 있고 탄탄한 연구들이 되어 있다면 본인의 글쓰기도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입니다.
기존의 이론들과 흐름, 맥락을 정리하기가 수월하다는 말입니다.
나 같은 사람들 혹은 훨씬 그 전의 학자들이 이미 수백 번 서로를 인용하고 정리하고 고친 문장들입니다.
문장 자체가 깔끔하니까 이해도 빠릅니다. 심지어 인용도 깔끔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박사 논문으로 씌여진 적이 없는 대상을 잡아서 다양한 이론적 틀로 분석한다.... 면
연구자의 명석함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박식 해야하는데
(연관성을 찾기 위해서는 학제를 넘나드는 박식함이 있어야 합니다.)
일단 저는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퀄과 랭귀지 requirement를 통과했다면 이제 논문의 작성만 남은 것이고
지난 몇 년간 꽤나 성공적인 박사생의 길을 왔다 할 수 있는데...
논문 주제를 잘 못잡으면.. 망합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누군가 말려주면 좋았겠지만)
누구도 좋은 지도를 해줄 수 없는 주제 자체의 문제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하는 상황이면..
반 쯤은 망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ㅜㅜ
2. 통과된 프로포절 바탕으로 글쓰기
전통적인 주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내 해석을 보태는 형태든지
아니면 맨 땅에 헤딩하는 것이 뻔히 보이지만 주제의 참신성과 독특성에 점수를 얻어 통과를 했든지.
일단 프로포절이 통과가 되고 나면 본격적인 읽기에 들어갑니다.
(박사생은 학제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생각합니다.
논문을 다운 받아서 읽으면 되는 분야들과
도서관의 물리적인 책들에 매달려야만 하는 분야들..어쨌건..)
처음에 책 혹은 논문을 아주 꼼꼼하게 읽고
거기에 나온 각주와 참고문헌들 중에서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봅니다.
이런 작업은 지도교수와 함께 하면 좋지만
예를 들어 100여 개의 책 목록을 주면서 이 정도면 기본서야.. 해주면 참 고맙겠습니다만..
이것이 이를테면 그 주제를 쓰기위한 맵입니다.
그리고 이 목록들이
주제 선정의 이유, 본격적인 연구, 다른 주제들과의 차별성.. 등등의 포지션을 정해줍니다.
없다면 자신이 만들어야 합니다.
(까짓거 뭐 하면되지.. ㅜㅜ 호기롭지만..
지난 수백 년의 연구성과들과 학제들의 분리와 이유를 간과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러니까 주제를 잘 잡아야합니다.
남들이 아주 좋다고 격려해줘도 수 십 번 다시 생각해 봐야합니다.
안그러면.. 망합니다.
읽기와 정리를 몇 달 하다보면.. 사유는 산으로 들판으로 강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학제간 연구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 학제를 넘나드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본인이 직접 울타리 치고 그 안에서만 작업 해야합니다.
안그러면 읽기 과정에서 너무 많고 다양한 대상과 접근법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중에 대부분은 논문에 직접 사용하기 곤란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조선의 여성의 시, 서간, 그림.... 등 을 페니니즘 관점으로 연구한다!
라고 하면 1. 구제적인 시기 2. 구체적인 대상들 3. 방법론. 이 세 가지가 된 겁니다.
그런데 지도교수가 critical theory 전공이긴 합니다만 페미니즘은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학자로서의 상식적 차원의 지식은 있으나
페미니즘 목록을 뽑아서 + 서양이 아닌 동양의 대상에 적용하는 방법론 + 역사적 배경.. 등을 잘 모릅니다.
그러면 연구자는 일단
페미니즘의 기본서들+서양의 전통에서 여성의 작품들을 분석한 책들+조선후기에 대한 전반적 사회 상황과 여성..
등이 기본적으로 해야할 리처치들입니다. 일단 독자가 내 지도교수, 즉 조선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데
조선과 동아시아 등에 대한 시대적 배경도 잘 정리해서 서술해줘야 합니다.
자~
도서관 사서 (미술사 전문 사서)와 친하게 지냅니다. 그리고 함께 기본서들을 뽑습니다. 잘 뽑아야합니다.
문제는 사서도 조선 후기를 잘 모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서도 조선 후기의 작품들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가장 안좋은 경우..
연구자 본인이 조선 후기가 낯설 경우. 대학에서도 조선사와 동아시아 역사 관련 수업을 들은 적 없는 경우.
연구자 본인이 페이니즘 이론은 가지고 놀 수 있을 정도로 빠삭한데..
미술사가들이 이해하고 이용한 페미니즘에는 약한 경우. (한 두번 비틀어서 사용..)
이 비슷한 주제로 한국 학자들이 쓴 영어 논문이 몇 편 있어서 참고 하려했는데...
역시나 그 양이 턱없이 부족한 경우.. ㅡㅡ
이런 경우가 안 좋은 경우 입니다.
어쩌면 컨퍼런스 페이퍼나 혹은 저널 페이퍼는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사 논문으로 쓰기에는 할 일이 많습니다.
연구자의 사명으로!!!
산과 들과 강에서 헤맸으니 이제는 망망대해 바다로 갑니다~
헤매이는 것은 내 삶의 목적이자 이유.. ㅜㅜ (슬슬 미쳐가는 겁니다.)
3. 모든 학문이 그렇듯...
이제는 프로포절의 약간의 변형을 거쳐서 건물을 디자인 할 차례입니다.
건축물을 중요한 기능들을 담당하는 요소들과 장식적인 요소들로 나눌수 있는 것처럼
일단은 기능만 생각합니다. 배수와 통풍의 필요성과 창문의 모양을 어떻게 해야할까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반드시 필요한 기능들만 잘 배치합니다. 일단은 건물이 무너지지 않도록.
이 단계가 목차와 세부 목차들의 정리와 배치 입니다.
여기까지 되고 나면 이제 반은 된 겁니다.
(저는 미국이나 영국 혹은 캐나다나 호주 사람이 아니니까..
영어로 글쓰기에 나머지 반을 남겨둡니다.)
자~ 한 명의 독립된 연구자로서,
곧 신진 학자가 될,
어떠한 인문학적 이론을 해체해서 재구성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이제는 논문만 쓰면 되는 멋진 박사과정생!
나의 꿈은 좋은 writer.. 좋은 teacher..
엄청난 착각입니다. ㅜㅜ (제가 그랬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지도교수의 지도가 코스웍 할 때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퀄 마치고나면 "너는 이제 독립된 한 명의 연구자. 축하해... " 이런 말 다 거짓이었습니다.
교수의 세밀한 지도와 교정은 이제 더 중요합니다. 더 많이 의지해야합니다.
마치 막 뭘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독립적인 연구자...는 말이 안됩니다.
이것도 지도교수의 전공과 친밀성이 있을 때야 가능한 겁니다.
4. 읽고 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시작한 지 얼마 안되서 금방 알게 됩니다.
조선 후기, 나 한국 사람, 조선인의 후예, 나 알아 조선. 그래서 공부 좀 했어...
네 공부했습니다. 일단 영어로 써야하니까 영어로 읽기도 많이 읽고.. 그런데 그 이해의 폭 이라는게
어쩐지 미국 고등학교 애들이 배우는 한국사 느낌이 좀 납니다. ㅜㅜ
차라리 조선왕조실록을 영어로 부분역 하는 건 오히려 낫습니다.
박사 과정생의 글이라기엔 조선에 대한 이해가 그 부끄러운 이해가 글로 마구 뿜어져 나옵니다.
글 다운 글로 다시 써보면 내 것이 아닌게 확연히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전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니까 단락이 뚝뚝 끊어집니다.
석사때도 박사 수업들을 때도 가끔 명문장이라고 칭찬들을 받습니다.
누구든 가끔은 그렇습니다.
어떤 종류의 문장들이냐면,
구체적인 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대의 사유와 배경 등이
두 세 문장에 클리어하게 녹아들어있는 경우. 평이한 문법사용. 이런 문장들이 명문장들인데..
이제는 제 글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박사 수준으로는 해당 주제의 일부에 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업을 듣고 책을 꼼꼼히 읽은 학부, 석사..의 공부가 중요합니다.
특히 길지도 그렇다고 찬란한 언변이 아니더라도
오랜 전문가를 걸친 전체 맵핑.... 말로든 글로든... 이런게 중요합니다.
보통은 수업시간에 듣게 되는데. 여튼.
퀄 통과하고 2년이 흘렀습니다.
많이 썼는데.. 다 지웁니다.
그동안 몇 번의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한 게 전부입니다.
역시나 저널 페이퍼는 녹록치 않습니다. 몇 번을 빠꾸당하고 나서는 그냥 둡니다.
전공이 거기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가? 그 쪽 저널 문체로 다 바꾸어줘야하나?.. 등등 고민이 듭니다.
내셔널 장학금 프로포절도 수십 번 써서 보냅니다. 잘 안됩니다.
요 당시 눈치 챘어야 했는데...
아 이게 지금 당장은 박사 논문 주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는 것을.
내가 뭘 잘 모르는구나.
학교에 이거 전공하시는 분이 있나? 혹시 청강할 만한게 있나?
미술사 전공자들은 왜 페미니즘을 이런식으로 밖에 이해를 못했지?
아, 그럼 영화 전공자들의 페미니즘을 좀 더 읽어볼까?
아니다.. 이 참에 정신분석에서 시작한 페미니즘 기본서들을 다시 읽자...
왜 한국 미술관들은 자료 내어주는데 인색하지?
분명히 이미지 파일들 있을 것 같긴 한데.. 왜 자꾸만 없다고 하지?
신기하구먼... ㅜㅜ
올 여름에 한국 가면 다시 직접 한번 가봐야할까봐... 등등.
그리고 나서 다시 2년 정도 흐릅니다.
많이 썼는데... 지난번 보다는 조금 덜 지우긴 했지만... 서도.
주변에서 제가 보기에 딱했는지..
자살 방지 위원회.. 에서 팜플렛을 줍니다.
물론 저는 시도조차 한 적은 없지만
눈빛과 걸어다니는 폼과 이상하게 어두운 아우라가 저한테서 뿜어져 나온 모양입니다.
잠은 잘 자는가? 라는 질문이 결혼 여부와 파트너 유무로 연결됩니다.
아마도 그들 생각에, 좋은 잠은 이성과의 잠자리를 동반하는 것인가 봅니다.
별 쓰잘떼기 없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집에 라면 받침대로 쓰려고 고이 접어 가방에 넣습니다.
이제 커미티 멤버들도 기다리기에 지칩니다.
프로그램에 저 뽑아준 노교수 한 분이 충고해주십니다.
great writer는 세상에 없다. 나도 아니다.
다음번에 조금 더 좋은 글을 쓸 뿐이다.
그리고... 니가 하는건 지금 책쓰는 거랑 비슷한건데
그거는 우리 때나 하던 거지 요새는 안 그런다.
나는 12년 걸려서 박사땄는데.. 요새는 5-6년이면 바로바로 나온다.
이제 우리는 잘된 논문을 원하는게 아니다.
어서 학위를 줘서 나가서 돈버는 것을 장려한다.
안 그래도 이 분야 먹고 살기 힘들고
재주도 없어서 학교 아니면 갈 곳도 없는 분야인데..
그리고 논문 쓰고 나서 책으로 내려면 2-3년은 출판을 미뤄라.
정확하게 자기가 뭘 논문으로 썼는지 알려면 2-3년 필요하다.
(쓸때는 뭘 모르고 막쓰는거다. 논문의 포지션은 한참 지나고 안다.)
걍... 막 써라.
너 지금 나이가.. 결혼은... 직장은... 등등등..
의 아주 좋은 충고를 해주십니다.
처음부터 그냥 쓰라고 말해주시지... ㅜㅜ
처음부터 퀄러티보다는 학위가 우선이라고 말해주시지...
아니.. 원래부터 쓰기 어려운 거라고 말이라도 해주시든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Challenging.
너의 논문 주제는 무척 챌린징한 거다.
처음엔 칭찬이자 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할,
그리고 역경을 딛고 서는 고독한 연구자.. 등의 자신감과 자기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젠 다 사라져버렸네요.
요새 아이들 말로 중2병스럽게 느껴집니다.
남은건 어떻게든지 논문을 마치는 것.
조금이라도 의심 쩍은 부분은 모두 잘라내어 버리고 남은 부분은 다시 잇는 것..
요새 하고 있는 주된 작업입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분명 반쯤은 망해서 시작했습니다만
일단 완성만 되면 뭔가 될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말이 너무 길었습니다.
요약하자면, 박사 논문의 주제 선정은 무척 중요하다. 연구자의 인생의 각도를 틀어 놓을 만큼.
그리고 위의 예는 제 주제와 아무런 연관 없습니다.
아무쪼록 모두들 즐거운 학교생활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