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희 / 사법대학 과학교육학과 | ||
일리노이 대학 (University of Illinois)은 미국 중서부의 대평원이 시작되는 일리노이주 주립대학의 하나로 Urbana-Champaign, Chicago, Springfield 시에 캠퍼스가 나뉘어 있다. 이 중 Chicago 캠퍼스는 의학계열의 단과대학이 유명하고 대부분의 단과대학은 Urbana와 Champaign에 위치한다. Chicago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2시간 가량 달리면 도착하는 Urbana와 Champaign은 인접해 있는 두 도시의 경계가 학교의 중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이곳에 둥지를 튼 기업이나 산업체가 제법 된다지만 얼마 전만 하여도 주민의 90 % 이상이 일리노이 대학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일 정도로 대학 중심의 캠퍼스타운이었다. 일리노이 대학교에는 공과대학, 교육대학, 음악대학, 상경대학, 문리대학 등에서 각 분야별로 미국 전역에서 상위에 꼽히는 학과가 많은데 미생물학과도 그 중 하나이다. 필자도 처음에는 다른 학과에 지원했다가 뒤늦게 미생물학과에 지원서류를 옮겨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 대학에서는 중복지원이 가능하지 않다. 복수 지원 가능성은 생각도 않고, 이미 지원한 학과에서 서류를 철회한 다음 미생물학과에 새로 지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학과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추천서까지 포함하여 제출한 모든 서류의 사본을 다른 학과에 보내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 곳 분위기였다. 평소 실력에 비하여 시험을 잘 보는 편이라 입학에 필요한 시험 점수는 그런 대로 잘 받아두었고, 운이 좋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니 입학허가를 받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입학한 다음의 생활이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언어 문제가 심각하였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TOEFL 성적은 영어 구사 능력과 무관하다. 첫날부터 시도 때도 없이 "How are you doing?" 하고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What are you doing?" 쯤 되는 말인가 보다 하고 짐작하고는 안 되는 영어로 지금 수강신청을 하고 왔다는 등, 도서관에 가는 길이라는 등, 더듬거리며 대답하기를 계속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이 말은 "Hi"하고 똑 같으니 긴 설명이 필요 없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밖에도 "What's up?"이라는 인사말에 천장만 멀뚱히 쳐다보는 등 비슷한 종류의 해프닝은 수없이 많았다. 한 학기 수업을 받고 나서 세균 바이러스 연구를 하는 Jeffrey Gardner 박사님을 지도교수로 정했는데 이 때부터 한동안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지도교수와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부출신인 이 분은 강한 동부억양을 속사포처럼 쏟아 내어 누구의 말보다 알아듣기 어려웠다. 지도교수는 지도교수대로 한국인의 독특한 억양과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은 이미 논문이나 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내가 말을 해야하는 경우에 이를 이해시킬 길이 없었다. 고민 끝에 문장을 겨우 만들어 질문을 하면 지도교수는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그 동안 했던 말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할 뿐이니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하는 수 없었다. 대충 넘어갈 밖에. 다행히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런 대로 내 말을 알아들어 이들이 중간에서 통역 아닌 통역을 담당해 겨우 겨우 실험실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주제에 웬 대학원 과정?' 하며 주변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아 점점 주눅이 들었다. 좌절감은 학교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다 차려 놓은 밥을 먹을 줄만 알았던 철부지가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대학원 생활과 함께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생활까지 한꺼번에 시작하자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책에 견딜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지도교수에게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이야기하였다. 겨우 지도교수와 말문을 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 때 지도교수는 정말 열과 성을 다하여 필자를 설득하였다. 만일 실험하는 것이 힘들어서라면 필자가 편한 시간에 와서 편한 대로 해 보자고, 그리고 그도 어렵다면 당분간 실험을 중지하면 어떻겠는가고, 그마저도 어렵다면 휴학을 하고 한 학기만 쉬어보라고... 나중에는 어떤 것이 되던 필자가 원하는 대로 해 줄 터이니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느 누구에게나 어려운 순간이 닥치게 마련인데 이런 순간마다 모두 포기해버리면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겠는가. 이를 슬기롭게 넘기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그 순간 그 분의 위로는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어쩌면 필자가 빠져있었던 열등감이 지도교수와 조차도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되었는데, 옆에서 진심으로 걱정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해 주는 교수님의 모습에 이 모든 어려움과 열등감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솟았다. 그 뒤로도 필자가 지도 교수님께 진 빚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전혀 실험에 대한 경험이나 배경 지식 없이 무작정 대학원에 진학한 필자를 마치 학부생을 가르치듯이 기본적인 멸균과정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가르쳐 주었고 논문을 쓸 때마다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영문법, 작문지도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무사히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는 필자에게 빼곡이 써 준 장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교수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 제자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너는 내게 커다란 보람을 안겨 주었다. 정말 고맙다.' 이 말은 필자의 성취가 남다르게 뛰어났다는 것이 아니다. 남보다 뒤에서 출발한 제자가 말도 배우고 글도 배우면서 졸업 논문을 쓰고 나가는 과정을 기뻐하며 격려해 주신 것이다. 이 편지와 함께 넣어준 100불 짜리 지폐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학위를 마치면서 마땅한 직장도 구하지 못한 채 서둘러 귀국하는 제자의 처지를 안타까이 여겨 보여준 아버지 같은 이의 소박한 배려였다. Gardner 박사님과는 졸업한지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버지와 딸로, 공동연구를 하는 학문의 동반자로 지내고 있다. 오는 6월에 천안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에 교수님이 초빙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앞두었던 마음이 이랬을까? 설레임으로 가슴이 벅차다. 동시에 한국에 계시는 동안 어디를 모시고 갈까? 무엇을 할까? 식사는 어디에서 무엇으로 할까?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나라에서 학회일정 외에 하루를 더 묵고 가시는데 어떻게 해야 그간에 졌던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지 고민이다. 가능하다면 조용한 산사에서 하루를 묵고 담백한 산사의 음식을 대접해 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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