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 유학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고 합니다. 외고나 자사고 유학반을 거쳐 아이비리그 등 외국 명문대로 진학하는 게 수재들의 정형화한 코스로까지 여겨지던 때가 있었죠. 심지어 초등학생에게 영어 가르친다며 온 가족이 1~2년쯤 ‘기러기’ 생활을 하는 게 당연시되기도 했습니다. 불과 2000년대 중반 얘기입니다. ‘묻지마 유학’이라고 불릴 만큼 너도나도 유학을 떠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공부 잘할수록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유학 목적으로 출국한 초·중·고생 수가 2006년 2만9511명에서 1만6515명(2011년)으로 확 줄었습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보내고 싶어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랍니다. 또 유학을 다녀와봤자 국내에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어려워진 점도 외국행을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라지요. 하지만 여전히 입시 위주인 한국 교육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유학. 형편이 된다면 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괜한 헛돈만 쓰는 걸까요. 학생과 학부모·교사, 그리고 유학원 관계자 등에게 물어봤습니다. 다음 주엔 유학 트렌드 변천사를 다룹니다.
메트로G팀
유학 "난 이래서 찬성한다"
영어는 기본 … 글로벌 경쟁력까지 갖추는 기회
박성렬(29)씨는 미 뉴저지에 있는 보딩스쿨(기숙학교) 페디 스쿨(Peddie School·프렙리뷰닷컴 미 보딩스쿨 진학률 16위)을 거쳐 코넬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국내 모 중견기업 창업주 손자로, 한 TV프로그램에 나와 번듯한 외모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유학 후 미 명문대 학벌을 내세워 취업할 수도, 혹은 가업을 물려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창업을 선택했다. 2011년 국내 처음으로 큐레이션 쇼핑(전문가가 테마에 맞춰 디자인 제품을 선별해 고객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쇼핑 서비스)을 제공하는 디자인 관련 벤처기업을 설립한 것이다. 초기 자본금은 가족이 아닌 주변 지인으로부터 투자받았다.
편한 길을 두고 왜 일부러 험한 길을 택했느냐고 물었다. 박씨는 유학에서 답을 찾았다. 유학 생활을 통해 도전정신은 물론 관찰력·분석력을 기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미국에선 중·고교 때부터 토론 수업과 팀 단위로 조사·연구를 하는 프로젝트 과제가 많다”며 “한국처럼 지식을 단순 암기하는 입시 위주 교육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며 끊임없이 이유를 찾아야 했는데 이게 졸업 후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페디 스쿨의 학급 당 학생 수는 15명 안팎이라 이런 세심한 교육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유학을 다녀온 학생 중에는 “국내에서 공부한 또래 친구보다 훨씬 큰 것을 얻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특히 명문 사립 중·고교 등 교육 여건이 뛰어난 학교를 다닌 이들일수록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고교생이라고 해서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리더로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입을 모은다.
영국 사립명문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졸업하고 옥스퍼드대를 거쳐 국내 증권사에서 근무 중인 홍문희(26)씨도 “꽉 짜인 입시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유학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생활의 3분의 1이 스포츠·음악·동아리 활동 같은 다양한 방과후 활동에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었다”며 “서로 협력하며 리더 역할을 경험해본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는 한윤정(25)씨는 중3 때인 2003년 캐나다 사립학교로 유학했다. 그는 “고교 과정인데도 대학처럼 수업이 이뤄지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과목을 골라 들을 수 있었다”며 “스키·수영·합창반 같은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다”고 돌아봤다.
이처럼 글로벌한 시각과 리더십을 강조하는 교육 시스템을 높이 사 부유층과 사회지도층일수록 유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그러나 박씨나 홍씨처럼 아예 중·고교 때 조기유학을 가는 게 아니라면 대학은 한국에서 다니고 대학원 때 유학을 가도 늦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유학을 목표로 한 자사고나 외국어고의 국제반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것도 이런 이유다.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 특성상 한국 학교에 적을 걸어놓는 게 향후 귀국해서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미 인디애나대에서 인포메틱스(정보과학) 전공 후 딜로이트에서 컨설턴트로 있는 신상훈(35)씨는 “여전히 세계 학문의 흐름을 주도하는 곳은 미국”이라며 “학부 유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인포메틱스처럼 경제·경영은 물론 수학·공학 등 인문·자연계열 전반의 학과를 넘나들 수밖에 없는 융합학문 분야 등에서 미국이 확실히 앞서 있다는 것이다.
미 미시간주립대 국제관계학과를 나와 한국물포럼 국제협력팀장을 맡고 있는 김윤진(32)씨는 유학 시절 벌어진 9·11테러 당시를 떠올리며 미국 대학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9·11테러가 발생하자 모든 교수가 정규 커리큘럼을 멈추고 이 사건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방식으로 2주 동안 수업을 진행하더군요. 한국에서는 국제관계학 관련 강의에서조차 이 같은 시도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씨는 “책 속 이론만 파는 공부가 아니라 재빠르게 현실에 대응하고 끊임없이 적용해보는 시도를 미국 대학은 많이 한다”고 말했다.
해외 유학이 시들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학부모가 유학을 ‘끔찍한’ 사교육 왕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긴다.
초등학교 때 1~3년가량 다녀오는 단기유학을 선호하는 학부모가 아직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한국에서 수년간 학원에 돈을 쏟아 붓느니 단기간에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학을 선택하는 것이다. 유학닷컴 홍지윤 실장은 “많은 학부모가 한국에서 3년 공부해야 할 걸 영어권 국가로 유학 가면 1년이면 된다고 생각한다”며 “미국·영국·캐나다 등 영어권 국가는 비용이 비싸 수요가 준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한 필리핀은 여전히 인기가 높다”고 설명했다. 부산외고 2학년 자녀를 둔 김모씨는 딸이 초등 5~6학년, 아들이 초등 2~3학년 때 함께 미국 보스턴에서 지냈다. 김씨는 “한국에서 영어 유치원과 학원을 계속 보냈지만 외국인 앞에서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며 “미국에서 현지 학생들과 친해지면서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었다”고 했다.
입시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유학을 택하기도 한다. 과거 도피 유학이라고 불렸던, 국내에서 좋은 대학에 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유학 가는 게 이런 경우다. 유학전문업체 세쿼이아그룹 박영희 대표는 “자녀가 중학생 때 국내 명문대 진학 여부를 판단하는 부모가 많다”며 “중학생 때 하위권이면 고등학교 올라가도 하위권을 못 벗어날 거라고 보기 때문에 서둘러 유학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좋은 대학 가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미국 중위권 대학을 목표로 유학을 결심하는 수요가 여전히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붐처럼 일고 있는 중국 대학 유학도 비슷한 이유란다. 중국유학전문 한재에듀케이션 김은홍 원장은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니까 국내 지방대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감에 유학을 가는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유학 "난 이래서 반대한다"
해외 졸업장 취업 효력 떨어진 지 오래…한국선 인맥이 최고
김모(19·고려대 건축사회환경공학부 1)씨는 자율형사립고인 하나고 유학반에서 해외 대학을 준비하다 고 3 때 국내대학으로 목표를 바꿨다. 주재원인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남아메리카 파나마에서 살다 고 1때 하나고로 편입했다. 영어 실력도 자신있었고 건축학과를 목표로 건축 관련 논문 등 포트폴리오를 착실히 쌓으면서 해외대학을 준비했었다. 그런 그가 국내 대학으로 방향을 튼 이유는 ‘어차피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무엇이 더 유리할까’란 생각 때문이었다. 김씨는 “국내에서 건축학계에 고려대 동문 파워가 강하다고 하더라”며 “대학에서 인맥을 만드는 게 더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굳이 해외 대학 학위가 필요하다면 석·박사 때 유학을 떠나도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한 때 외국대학 졸업장은 국내에서 취업 성공의 지름길로 인식됐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국내 취업시장에서 해외파의 고전 현상이 나타났다. 잡코리아 헤드헌팅사업부 안현희 이사는 “한국 기업들이 외환위기 이후 10년간 ‘묻지마 채용’에 가까울 정도로 해외파 학생들을 대거 채용했지만 최근 3~4년 전부터는 반대로 해외파를 꺼리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세계경제 흐름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해외파 출신을 영입했지만 실제 업무를 시켜보니 국내대학 출신에 비해 큰 장점이 없다는 것이 기업들의 대체적인 평가가 됐다는 것이다. 높은 연봉도 기업 입장에선 부담이 됐다. 안 이사는 “일부 해외사업부를 제외하곤 외국어능력이 생각만큼 중요하지 않는데다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해외파보다 한국의 조직문화를 이해하고 융화할 수 있는 국내 명문대 출신을 선호하는 인식이 퍼졌다”고 말했다. 한 전자업계 임원은 “한국에서 인문계 출신은 마케팅을 하든 영업을 하든 고교나 대학 연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문계 유학파는 뽑지 않는다”고 귀뜸했다.
해외 중·고교로 유학을 갔다가 국내 명문대로 진학하는 통로가 됐던 글로벌리더·국제학부·어학특기자 전형의 선발 인원이 줄어든 것도 해외로 나가는 발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고려대·서강대·성균관대·이화여대·연세대·중앙대·한양대 등 7개 대학에서 이런 전형으로 선발하는 총 인원은 2011학년도 2178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이후 해마다 줄었다. 2014학년도는 1634명이다. 유학을 갔다가 외국대학 진학에 실패하더라도 국내 대학으로 돌아올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다. 오종운 이투스청솔 평가소장은 “이런 전형은 해외 유학생뿐 아니라 국내 외국어고·국제고, 하나고·민사고 등 자율협사립고 학생까지 지원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며 “해외 유학생의 국내 명문대 진학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서적으로 민감한 청소년기에 외국의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다는 문제제기도 많았다. 2005년 초등 3학년 자녀를 데리고 2년간 미국에 다녀온 김휴정(43·서울 반포동)씨는 “당시 유학온 한국 학생들이 많았는데, 갑자기 개방적인 문화에 노출되니 정서적으로 불안해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미국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거나 한국 학생끼리만 몰려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주변에 단기유학을 오면서 조카까지 데려온 엄마가 있었는데, 교육비·생활비 문제로 형제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더라”고 했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걱정하는 부모도 많다. 한모(46·서울 서초동)씨는 2007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 보스톤으로 떠났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둘째 아이가 3학년 때였다.“미국에 가서 1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집에 어른이 찾아오자 아이들이 쇼파에 앉아서 ‘하이’하면서 손인사만 하는거예요. 손님이 돌아가고나서 왜 그렇게 예의없게 굴었냐고 물었더니 ‘미국에선 다 이런다’며 도리어 핀잔을 주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었죠.” 현지에서 적응을 잘하면 중·고교도 현지 사립학교로 보낼 작정이었지만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곤 마음을 바꿨다.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미국 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아이들 중엔 부모를 부모로 보지 않고 물질적으로 도움주는 사람, 나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사람으로 인식하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채드윅·브랭섬홀아시아·NLCS제주 등 국제학교도 외국행의 대안이 됐다. 김모(39·제주)씨는 첫째 아이를 NLCS제주에, 둘째 자녀를 브랭섬홀아시아에 보내고 있다. 원래 집은 서울이었지만 집도 제주로 옮겼다. 김씨는 “입시 위주 교육이 싫어 아이들을 유학 보낼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국제학교가 국내에 들어서면서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샤론코칭 이미애 대표는 “많은 부모들이 이제 영어 교육과 관련해선 영어유치원-사립초-국제중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대안으로 생각한다”며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늘었다”고 말했다. 영어를 중시하는 강남 대치동 등에선 비용이 싼 필리핀으로 단기 영어캠프를 보내고 있다.